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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야구장 구경을 딱 한 번 했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에서 일할 때 동대문구장을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다. 황금사자기 대회였는지 봉황대기 대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교 야구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고교 야구를 보기 위해 동생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그후로 30년하고도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텔레비전으로 야구경기를 많이 보긴 했지만, 내 발로 직접 야구장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난 7월 31일 난생 처음으로 서울 잠실야구장에 갔고, 또 난생 처음으로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닌 '가족과 함께' 말이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찜찜한 우울함과 죄스러움 같은 것이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도 맛보았다. 복잡한 마음 때문에, 또 술은 물론이고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 없는 몸 사정 때문에 더욱 관전에 몰입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우민화정책'을 경멸하며 살아온 세월

나도 아내도 야구장을 찾기는 30여 년 만이었다. 아내는 공주사대부고 재학 시절, 공주고 야구팀 때문에 여러 번 응원에 동원되었다고 했다.
▲ 잠실구장의 우리 가족 나도 아내도 야구장을 찾기는 30여 년 만이었다. 아내는 공주사대부고 재학 시절, 공주고 야구팀 때문에 여러 번 응원에 동원되었다고 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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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 시절 운동선수였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한 번 배웠다 하면 금방 익혔다. 타고난 운동 신경이 유별난 편이었다. 그래서 '팔방미인'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고교 시절에는 축구 선수(골키퍼)로 전국대회에도 출전했고, 많은 이들이 내가 장래 축구선수로 크게 출세하리라고 예견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당시 대전의 한 축구 명문고에서는 시골학교 선수인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가, 선수 학부모들의 반대로 계획을 접은 일도 있었다.       

나는 군 복무 시정 당시 논산훈련소 대표 격구선수·배구선수로 뛰었고, 베트남에서도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배구선수로 사단사령부 배구대회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그때 29연대, 박쥐부대장 전두환 대령의 대머리를 처음 보기도 했다).    

군 전역 후 한동안 고향에서 살 때는 서산군 대표 축구 선수와 배구 선수로 도(道) 대회 등에 출전하기도 했는데, 1975년 객지 유량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모든 운동과 담을 쌓았다. 1980년 가을, 5년여의 객지 유량생활을 접고 귀향한 뒤로도 운동 쪽으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향의 체육단체들이 참여를 권유했지만 거절하곤 했다.

나는 잠실구장도, 프로야구 현장 구경도 처음이었고, 가족과 함께 야구 구경을 하기도 처음이었다. 일말의 우울함과 죄스러움 가운데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야구장의 우리 가족 나는 잠실구장도, 프로야구 현장 구경도 처음이었고, 가족과 함께 야구 구경을 하기도 처음이었다. 일말의 우울함과 죄스러움 가운데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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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소설문학>지 신인상 당선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선 뒤로는 오로지 고장 정신문화의 텃밭을 일구기 위한 일념으로 지역 언론과 고장 문예마당을 지키며 살아왔다. 스포츠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스포츠와 담을 쌓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군화로 짓밟고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장악한 5공 군사정권이 국민들을 우민화하기 위한 '3S 정책'(스포츠·스크린·섹스)에 몰입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1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것도 5공 정권의 우민화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환호와 열광을 선사하는 한국 최대의 스포츠 행사가 되었지만, 그 출발은 '3S 정책'에서 발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인식 때문에 처음에는 프로야구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러 텔레비전으로 '가을 야구'를 보기는 했지만,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함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야구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야구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로, 대전으로, 심지어는 대구와 부산까지 가는 한 친구의 유복(裕福)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 친구는 어느 정도 내 경멸의 대상이기도 했다.

잠실구장에 앉아 난생 처음 프로야구를 보다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는 김혁민이었다. 'LG트윈스' 1번 오지환은 3회 말 공격에서 솔로 홈런을 쳤다.
▲ LG트윈스 공격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는 김혁민이었다. 'LG트윈스' 1번 오지환은 3회 말 공격에서 솔로 홈런을 쳤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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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은 종종 야구장을 간다고 했다. 잠실구장에도 가고 목동구장에도 가서 야구 경기 관람을 즐긴다고 했다. 내가 보내주는 용돈을 축내 야구장을 간다는 사실에 내심 조금은 언짢기도 했지만, 그것을 금할 쪼잔한 아빠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집에 올 적마다 텔레비전으로 야구경기를 보며 엄마에게도 야구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야구 전문가가 돼 있었다. 아들 녀석보다도 딸아이가 야구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았다. 딸아이는 각 프로구단의 연혁과 성격이며, 감독들과 선수들의 특징, 사생활, 소소한 에피소드의 내용들까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딸아이가 소상히 알려준 덕에 아내도 어느새 야구의 룰을 자세히 알게 되니 야구경기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텔레비전을 켰다 하면 야구 경기부터 보곤 했다. 아내도 어느새 야구광이 돼 버린 것. 그 바람에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내의 독서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을 나는 도리 없이 체감해야 했다.

나도 프로야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 안방에 들어가면 아내가 프로야구 관련 프로들을 보고 있으니(그런 마누라를 쫒아내면 나만 더 외롭고 쓸쓸할 테니), 도리 없이 함께 프로야구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프로야구에 조금 중독됐다.

그러나 나는 프로야구에 완전히 중독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일정한 방책을 만들었다. 프로야구 8개 구단에 고루 관심을 두지 말고, 오로지 '한화 구단'의 경기만 보자는 설정이었다. 다시 말해 4개 스포츠 전문 채널 중에서 '한화' 경기를 중계하는 채널만 찾아서 보자는 생각이었다.

결국 내가 '한화' 팬임을 고백한 셈이다. 나는 정치 지형과 관련하는 지역주의를 혐오하고 경계하는 사람이지만, 프로야구와 관련해서는 연고지 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화 구단'은 대전이 본거지다. 또 대전은 충청 지방이다. 그러니 '한화' 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잠실구장 포수 뒤 노란색 자리 88열에 앉은 우리 가족은 '한화' 응원단 쪽이었다. 함께 응원에 열중하면서도 아들 녀석은 스마트폰으로 TV를 보기도 했다.
▲ '한화' 응원단 쪽의 우리 가족 잠실구장 포수 뒤 노란색 자리 88열에 앉은 우리 가족은 '한화' 응원단 쪽이었다. 함께 응원에 열중하면서도 아들 녀석은 스마트폰으로 TV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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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다음으로는 '기아 구단'을 좋아한다. '기아 구단'의 본거지는 광주다. 나는 빛고을 광주를 좋아한다. 예나 지금이나 광주는 내 뇌리에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돼 있다. '기아'가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며칠 동안 흥분상태가 유지되었던 것을 잘 기억한다.

'기아 구단' 다음으로는 '넥센'을 응원한다. '현대'가 내 버린 선수들을 쓸어 담아 구단을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넥센'은 '히어로즈' 시절부터 내가 동정의 눈으로 보고 있는 팀이다. 여기에는 '현대'에 대한 반감 같은 것도 작용한다.  

아무튼 나도 프로야구 '한화 구단' 경기를 열심히 보다보니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화 구단' 경기를 보다 보면 결국 모든 구단과의 경기를 다 보는 셈이니 다른 구단들의 감독과 선수들의 이름이며 포지션도 두루 알게 됐다.

그렇게 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를 보다보니 마누라 데리고 아이들과 함께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게 됐다. 내 눈치를 챘는지 집사람은 여름방학 때 서울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야구장 구경을 한번 해보자는 제의를 했다. 나는 집사람의 그 제의를 매정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딸아이에게 전화하여 '한화구단'의 서울 잠실구장 경기 일정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한화' 대 'LG'의 7월 31일(화요일) 저녁 경기를 택했다. 나는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덕수궁 대한문 앞 '생명평화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가기 때문에 7월 30일 월요일 밤을 서울에서 보내기로 했다. 집사람도 '대한문미사'에 참례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노친 때문에 집사람도 같이 월요일에 서울을 갈 수는 없었다. 집사람은 화요일 오후에 올라와서 함께 잠실구장을 가기로 했다. 노친께는 저녁 한 끼만 손수 차려 잡수시도록 말씀 드리고 허락을 얻었다.    

집사람은 잠실구장에서 가족이 저녁을 때울 김밥과 오징어볶음을 한 보따리 들고 올라왔다. 딸아이와 함께 고속터미널로 마중을 나가 집사람을 만난 다음 잠실역으로 갔고, 거기에서 아들 녀석을 만나 네 식구 함께 잠실구장으로 들어갔다. 딸아이가 일주일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한 포수 뒤 노란색 자리 88열에 나란히 앉았다.

감개무량함을 맛봤다. 실로 30년하고도 수년 만에 다시 찾은 야구장이었다. 난생 처음 잠실구장을 구경하는 날이고, 또 난생 처음 프로야구 경기를 구장에서 보는 날이었다. 그것도 가족과 함께였다.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절로 흥분상태가 고조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구장에서 갖는 일말의 우울함

서울 잠실구장에도, 또 평일인데도 '한화' 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응원단 규모가 'LG' 홈구장 응원단에 못지 않았다.
▲ '한화' 응원단 서울 잠실구장에도, 또 평일인데도 '한화' 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응원단 규모가 'LG' 홈구장 응원단에 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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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였다. 양쪽의 응원 열기가 너무도 뜨거웠다. 텔레비전으로는 접할 수 없는 갖가지 음향이 조화롭게 난무하는 역동의 현장이었다. 그 열광 속에서 음식과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가족도 집사람이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먹고, 아들 녀석이 매점에서 사온 음료와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하는 신세였고, 술을 마실 수 없는 몸이었다. 건강한 몸으로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조금은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그러면서도 함께 즐거워했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불현듯 언젠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종종 야구장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한 말이었다.

"종종 야구장을 가더라도, '사회적 고민'도 할 줄 아는 젊은이로 살아야 한다. 사회적 고민과는 아무 상관없이, 아무런 문제의식도 지닌 채 않은 채, 그저 환호와 열광 속으로만 몰입하는 우민대중의 한 개체로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빠의 말뜻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한마디 더 부연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사해야 할 주권을 포기한 채, 투표장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고 야구장으로 달려가는 그런 철없는 젊은이들과 똑같은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구장 안에서 환호와 열광을 즐기면서도, 우리 주변에는 야구장 구경은 꿈도 꾸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LG트윈스'의 선발투수는 김광삼이었다. '한화이글스'가 1회 초 공격에서 선취점을 뽑았으나, 결국 5:3으로 지고 말았다.
▲ '한화이글스' 공격 'LG트윈스'의 선발투수는 김광삼이었다. '한화이글스'가 1회 초 공격에서 선취점을 뽑았으나, 결국 5:3으로 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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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간단한 대답과 고개 끄덕임 등으로 아빠의 말을 수긍했다. 나는 아이들을 더욱 미더운 눈으로 보았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고생스럽게 서울을 오가며 '대한문미사'에 참례하는 아빠를 깊이 이해하고 미사에도 함께 참례하곤 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미더움과 고마움 때문에 나는 선뜻 아내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딸아이에게 잠실구장 예약을 지시한 셈이기도 했다.

내 아이들에 대한 미더움 속에서도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고 허전했다. 야구장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환호하고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관중들 모두를 회의의 눈이 아닌 미더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 희망이기도 했다. 그 희망 때문에 이상한 죄스러움도 자꾸만 벌불 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났을 때 아내가 내게 물었다.

"한화가 져서 아쉽긴 하지만, 그대로 스트레스가 싹 가시는 기분이에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당신은 어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일말의 우울함과 이상한 죄스러움 가운데서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건 분명하니까."

명확한 소리로 대답해주고, 나는 그 순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내의 여름방학 중에, 다음에는 '한화 구단'의 홈구장인 대전구장에 가서 '한화' 경기를 보기로. 그리고 그때는 아내와 사별한 후 7년째 혼자 쓸쓸히 살고 있는 동생도 데리고 가기로 말이다. 나는 딸아이에게 '한화 구단'의 8월 중 대전구장 경기 일정을 알아보라고 했다.


태그:#프로야구, #한화이글스, #잠실야구장, #우민화정책, #3S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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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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