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파리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프랑스 친구 야니스의 친구 자취방을 무료로 점유하고 있느라 편하게 발 뻗고 잔 적이 없었다.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마음씨 좋은 친구의 친구는 곧 만기가 다가오는 그 집을 프랑스 각처에서 온 친구들에게 개방하고 있어서 마치 노숙자의 쉘터(shelter)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우릴 초대해주신 클로드아저씨께서는 우리를 위해 방 하나를 내놓고, 심지어 침대의 시트까지 마치 호텔의 그것처럼 완벽하게 정리해두셨다. 화장실은 얼마나 크고 좋던지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친구의 친구네 욕조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클로드 아저씨 집에서의 둘째 날은 루아르 강 유역 고성을 방문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3년 전 어학연수로 프랑스에 왔을 때 뚜르(Tours)의 고성투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명한 루아르강 유역의 성들은 다 둘러봤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서 가본 성 한 곳, 안 가본 성 한 곳 이렇게 두 곳을 가기로 했다.

집에서는 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아저씨는 차에서 성으로 가는 동안 우리의 대화를 통해 배울 한국말을 적을 노트까지 챙겨오셨다. 그날이 마침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라 출발하기 전에 투표소에 먼저 들렸다. 아저씨,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오늘 저녁 늦게 도착하느라 엄마에게 대리선거를 부탁한 딸 오렐리 몫까지 투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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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의 날 투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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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향하는 길, 언니와 내가 하는 한국말을 잡아내서 노트에 적느라고 정신없는 클로드아저씨 대신 운전은 마리아주머니가 맡았다. 수다쟁이 아저씨 덕분에 2시간이 훌쩍 갔는데, 아저씨가 지도를 보고 아주머니에게 길을 알려줘야 되는데 우리와 대화하느라 지도에는 영 신경 안 쓰는 통에 아주머니가 애를 꽤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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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에 흠뻑 빠지셔서 아주머니가 3번은 얘기를 해야지 겨우 지도를 펴시는 클로드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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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성들이 모여있는 루아르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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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갔던 성은 쉴리 쉬르 루아르성(Chateau de Sully-sur-Loire)이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중세의 성은 다른 루아르의 성들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그만의 매력이 넘치는 성이었다. 성은 해자(垓字)로 둘러져 있는데 아주 고즈넉한 매력이 있다. 1602년에는 앙리4세 왕 때의 능력 있는 경제장관이었던 '쉴리(Sully)'가 이 성을 샀다. 쉴리 쉬르 르와르라는 이 성의 이름도 경제장관 '쉴리'에서 따왔다. 성 안에 쉴리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 걸 읽고, 아저씨가 '예전 사람인데도 이렇게 오래 살았네' 하신다. 다시 보니 쉴리는 1559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했으니 82년을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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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리 쉬르 루아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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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성이어서 르네상스에 지어진 성만큼이나 외부가 화려하진 않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말이 달라진다. 파란색, 분홍색, 빨간색 등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방들에는 만화에만 나올듯한 화려한 의자와 침대,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의자와 침대를 자세히 보면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의자는 너무 낮고, 침대는 너무 짧은 것이다. 당시 유행이었는지, 정말 그때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을 찾아내면서 여러 방 구경을 하는 것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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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성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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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성의 큰 탑 내부이다. 지붕 아래에 나무골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골조는 14미터에 이르는 높이로 지어져있어 그 탑 내부에 들어가자마자 그 규모에 압도된다. 성을 보고 나온 클로드아저씨도 이런 매력적인 성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며 신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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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나무 골조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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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의 방과 인상적인 나무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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