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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아내와 함께 포도밭에서 일하는 모습
▲ 포도밭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아내와 함께 포도밭에서 일하는 모습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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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농사의 절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간뿐 아니라 농사일 역시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장마철, 구름과 비가 연일 오락가락하는 요즘, 고대하던 농한기 휴식의 여유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귀농 6년 차, 바람 같은 세월 속에 이젠 농사의 생초보라 할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도 농사일은 내게 늘 새롭기만 합니다. 홀로 마루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보노라니 지난 몇 달간의 농사일이 꿈결처럼 지나갑니다.

포도농사의 진검승부는 알솎기입니다. 가장 바쁠 시기입니다. 적정한 수의 알을 남겨야지만 사람이 먹을 포도가 됩니다. 모양도 만들어줘야 하고 무엇보다 일정 시간 내에 알을 솎아줘야 합니다. 처음에는 새벽에 나가 나무를 털어주면서 알을 떨어트립니다.

올해는 고온과 가뭄현상으로 포도알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애써 구한 품(인력)도 취소하고 아내와 둘이서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황혼까지 아내와 둘이서 포도알에 붙어살았습니다. 수 만개의 송이를 한 송이씩 잡고 알을 떼 주는 작업, 길고도 긴 대장정입니다.

처음 며칠간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사나흘이 지나자 인내와의 싸움이었고 일주일이 지나자 체력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루 14시간의 노동, 하루 종일 서서 포도알만 잡고 떼는 단순 노동,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단순반복 노동입니다.  어깨와 허리, 다리 곳곳에서 피로의 신호를 보내옵니다.

품(인력)을 써서 며칠 만에 일을 끝내는 다른 농가를 보면 괜히 짜증도 나고 초조해지기도 합니다. 보름간의 알솎기를 겨우 끝내고 드디어 봉지 씌우기 작업에 들어갑니다. 역시 약 4만개의 봉지를 씌우는 일입니다. 다행히 큰딸이 농활대를 이끌고 우리 마을로 들어와 농활학생들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일주일 만에 봉지까지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봉지까지 끝냈다는 안도를 뒤로하고 포도 때문에 방치된 벼논, 고추밭, 토마토 등 밭일까지 얼추 마무리 지으니 장마가 시작됩니다. 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 편한 휴식을 보장해주는 단비입니다. 올해는 그래도 품 들이지 않고 아내와 둘이서 봉지까지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노동만큼 휴식과 놀이도 중요합니다.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을 탄생시키고 놀이는 휴식을 찰지게 만들어 줍니다. 돌아보면 고된 노동이었지만 잠시나마 여유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으니 하늘이 농부에게 주신 혜택이라 생각합니다.

일 년 단위로 돌아가는 '농부의 삶', 뿌듯합니다

 장맛비가 내리는 날, 마루에 앉아 포도농사의 기억들을 떠 올린다.
▲ 포도단상 장맛비가 내리는 날, 마루에 앉아 포도농사의 기억들을 떠 올린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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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월급쟁이와 달리 모든 노동이 일 년 단위로 결실을 맺습니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농사로 십년 세월이 가면 어느덧 인생도 흘러가겠지요. 스스로 굵직한 삶이라고 높여 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사 일 년 내내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달 고생하면 되는 일이다." 맞습니다. 월급쟁이처럼 일 년 내내 출퇴근하며 시달리는 일은 아닙니다. 포도농사도 계산해보면 일 년에 6~7개월 정도 일하는 농사입니다.

오이는 3개월에 심기에서 생산까지 끝내는 고소득 농사입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특히 7~8월 한여름의 노동은 두 번 다시 오이 농사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듭니다.

요즘 EBS 교육방송의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힘든 노동의 현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인데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 지구촌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저리도 고생을 하는 구나.'

농사가 어느 정도의 극한 직업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농사보다 더 힘들고 격한 일도 많습니다. 다만, 가장 힘들고 바쁜 시기만큼은 농사 역시 극한의 직업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노동은 저마다 가치 있고 숭고합니다. 남의 것에 기대지 않을 때 말입니다. 생산을 하는 인간의 땀과 수고에 합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세상, 우리가 말하는 '진보의 종착역'이 아닐까? 비오는 날 홀로 생각해봅니다.


태그:#포도, #장맛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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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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