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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진 불두화는 여기서도 여전하다. 부처의 머리를 닮았다해서 붙여진 그 이름은 한없이 마음이 겸허해지게 하는 힘이 있고 그 모양새도 너무도 아담하다. 무심결에 다가서는데 발밑에서 화다닥 거리며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있어 고개를 숙여 보았다. 자그마한 땅굴 안에 두꺼비 한 마리가 눈만 껌뻑인 채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고 녀석, 요 굴을 설마 제 힘으로 판 건가?"

 

혼자 웃음을 지어본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낙산사에는 점점이 연등이 밝혀져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곳은 지난 2005년에 큰 화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인근 임야에서 시작된 불이 사찰에 옮겨 붙었고, 그 결과로 절집 스물한 채가 불타고 보물 479호인 동종이 녹아버린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낙산사는 역사를 거슬러 여러 번의 중건 과정을 거쳤다. 858년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불탔고, 이후에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1953년과 1976년에 다시 복구됐다. 최근 2005년 4월에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스러져간 문화재들은 불자들과 스님들의 노력으로 역사의 흔적을 안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절 이름 '낙산'이 산스크리트어 '보타락가'에서 유래한 말이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1300년 전에 의상대사는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수없이 애타하며 지금의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절망해서 바다에 투신하려 했고, 그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그곳이 지금의 낙산사 홍련암 자리며, 홍련암 법당 가운데 작은 구멍으로 굴속을 넘나드는 바닷물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그 흔적이다.

 

절 관련 안내문을 읽고 섰으니 방 배정이 다 됐다고 초로의 사무원이 말했다. 파도 소리가 그득한 법당으로 들어서려는데 셔츠 위로 잔뜩 땀이 밴 여자 하나가 뒤따라오며 목례를 했다. 창밖의 파도는 법당 안에도 넘실대는 듯했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많은지 속닥거리는 소리에, 좀 전에 뒤따라왔던 여자는 모포를 확 둘러쓰곤 신경질적으로 돌아누웠다. 씻지 않은 몸에서 짙은 땀내가 들어쳤다.

 

이윽고 새벽 세시. 홍련암으로 들어서니 비구니 승이 졸음이 덜 깬 목소리로 염불을 외고 있었다. 목탁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목 언저리와 절 방석 위로는 조그만 송충이들이 기어가고 있었고, 염불이 하나씩 끝날 때 마다 연신 목 주위를 훑어내는 그녀에게 여름 새벽의 독경이 아직은 익숙치 않은 듯 했다. 공부 중인 남자 스님들은 무릎이 부서져라 박진감 있고 빠르게 백팔배를 시작했다. 신도들도 더더욱 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파도는 끝없이 출렁거리고 달은 여전히 밝았다.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풍광에다 동해바다. 그것을 배경으로 높이 16m의 해수관음상이 왼손에 감로수병을 들고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다. 그저 풍광으로 치자면 이만한 곳이 없다 싶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는 여성 기도객들의 합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파도소리는 어김없이 방 안에 꽉 차 있었고 옆에 누운 까탈스런 기도객은 이미 딴 세상을 탐험 중이었다.

 

창문을 열다보니 저 아래로 좀 전의 비구니승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통통한 뺨을 한손으로 어루만지며 뭔가 부끄러운 듯이 '에구구구 왜 그랬지?' 하는 표정으로 호젓한 달빛 아래를 혼자 살살 걸어가는 중이었다. 공부 중인 승려로서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은 자신의 오늘 독경을 스스로 질책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관음상을 그냥 지나칠 뻔 하다가 '헉!'하고 놀라더니 공손하게 기도를 드리곤 갈 길을 갔다. 그윽한 달빛과 파도소리가 쏟아지는 새벽, 불두화의 정갈한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사찰의 아침 공양이 시작되었다. 이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점심때 까지 굶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던지 전날의 까탈쟁이는 세수도 안 한 얼굴로 공양간에 와서 할 술 뜨는 참이었다. 들기름에 볶아서 잘 조린 감자는 구수하고 타박하니 맛이 있었다. 향이 짙은 버섯볶음, 애호박과 무를 자박하게 썰어 끓인 국에서는 어린 날 시골집에서 먹던 그윽한 맛이 느껴졌다. 건너편에 앉은 사찰 직원 명찰을 단 장년 여성은 얼굴 가득 부처의 미소를 머금고 수저를 움직였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때로 그 장중한 믿음이 사람을 강하게 붙들어 섣불리 방향을 틀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금각사에 불을 지른 미조구치는 뒷산에 올라가 그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앉았다. 그리고 그 성난 화염을 보며 자살하겠다던 마음을 접고 '이제는 살아야지' 하고 일어섰다. 그토록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던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에게는 또 다른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것이 옳은 것일지 그른 것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윽고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이번엔 설악산 쪽으로 가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백담사 까지만 가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그 이상의 거리, 6시간을 걸어 올라 암벽 위의 봉정암 까지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신고 있는 것은 그저 젤리슈즈였지만 반드시 그대로 올라가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덧붙이는 글 | 7월 첫 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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