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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재로도 불리고 만월재로도 불리는

고백이골을 지나 고갯마루로 향하는 대원들
 고백이골을 지나 고갯마루로 향하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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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백운리 이장님이 나왔다. 고백이재 고갯마루까지 길을 안내해 주겠단다. 마을회관을 빌려준 것도 고마운데, 길안내까지. 이게 아직도 남아있는 시골인심이다. 백운리는 현재 중골과 고백이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중골을 출발 고백이골 방향으로 나간다. 옥천 청산에서 보은 탄부로 넘어가려면 세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백운리와 만월리를 연결하는 고백이재, 만월리와 오천리를 연결하는 오구내재, 오천리와 대양리를 연결하는 비조티 고개가 그것이다. 고백이재는 만월리로 넘어가는 고개라서 만월재라고도 불린다. 고백이재로 가는 골짜기 좌우로는 백운리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부터 길이 좁아지고 희미해진다. 과거 고백이재는 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었고, 사람들의 통행도 많았다고 한다.

고백이재에 대해 설명하는 백운리 이장
 고백이재에 대해 설명하는 백운리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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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만월리에서 석회석과 흑연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만월리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 청산으로 학교도 다니고, 장에도 다니고, 광석도 운반했다고 한다. 특히 흑연은 석탄보다 열량이 많이 나가고, 연필심으로도 사용되어 일제강점기 대대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산길을 약 20분 정도 오르자 고백이재 정상에 도달한다. 이곳 고백이재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도덕봉에 이를 수 있다. 도덕봉에는 옛날 봉수대가 있었고, 날씨가 좋으면 구미 금오산과 보은 속리산이 보인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을 이장과 헤어져 만월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최근에 사람이 다닌 흔적은 거의 없지만 길을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일부 지역에는 축대를 쌓아 길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산수국도 보고 까치수영도 보면서 한 30분을 내려가니 인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콘크리트 포장을 해놓았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내려가 만월리 마을회관에서 잠시 쉬면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만월리회관
 만월리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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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리의 원래 이름은 만드래다. 이름으로 봐서는 들이 많은 마을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다르게 설명한다. 이곳이 산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로, 달이 뜨면 마을이 대낮같이 밝아서 만월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후 가득할 만(滿)자가 일만 만(萬)자로 바뀌어 현재는 만월(萬月)이라는 마을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 만월리에는 경주김씨와 전주최씨가 많이 산다.

오구내재를 넘어 보은군 마로면으로

만월리에서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보통 오구내재로 불린다. 오천리의 옛 이름이 오구내이고, 그 때문에 오구내재라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이 최근에 넘나드는 사람이 없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 묘를 조성하면서 새 길을 냈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우리는 한 번 정도 길을 잘못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골짜기를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어쩌다 능선으로 접어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구내재 고갯마루
 오구내재 고갯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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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내재 고갯마루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서낭당이 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고개를 내려간다. 이 길 역시 그동안 사람 통행이 없어 한두 번 길을 찾아야 했다. 한 이십분 길을 내려오니 농로로 이어진다. 보은군으로 넘어와서 그런지 대추나무 농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커다란 농사용 연못도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농로를 따라 오천리로 내려간다.

오천리 역시 대단한 산골이다. 마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발달해 있다. 산쪽에 있는 오천2리에 도착한 우리는 마을 안길을 돌아 오천1리 쪽으로 내려간다. 오천2리 마을 가운데로는 시내가 흐르고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오천1리로 내려간다. 길옆으로는 포도밭이 있고, 농부들이 포도알을 솎아내고 있다. 잔 포도송이가 많은 것보다 굵은 포도송이가 열리는 게 더 상품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포도밭 주변에는 살구나무도 있고, 복숭아나무도 있다.

포도알을 솎아내는 농부들
 포도알을 솎아내는 농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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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천1리 경노당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로 계속 가면 보청천과 만나고 505번 지방도를 타고 청산면과 마로면 소재지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 비조티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조티 고개를 넘을 예정이다. 비조티(飛鳥峙)는 탄부면 대양리 수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수피재라 불리기도 한다. 고개 모양이 새가 나는 형상이어서 비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고개를 넘기 위해 복사골을 지나면서 보니, 농부들의 일손이 바쁘다. 우리는 이들을 멀리 하고 고갯길로 들어선다. 이 고개는 지금까지 넘은 두 고개보다는 수월한 편이다. 그렇지만 역시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을 찾는데 조금 애를 먹는다. 사실 이번 탐사를 계획하면서 이 고개 넘기가 가장 즐거울 줄 알았는데, 가장 어려웠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과 현실의 차이를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탄부에서 마로로 이어지는 너른 들 이야기

탄부면 너른 들 너머로 구병산이 보인다.
 탄부면 너른 들 너머로 구병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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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조티를 넘으니 앞으로 너른 들이 보인다. 옥천의 너른 들이 청산에 있다면, 보은의 너른 들은 탄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조티 고개 넘어 처음 만나는 마을이 대양리 수피다. 수피라는 마을 이름은 숲이라는 우리말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현재는 마을 앞 들판에서만 숲을 발견할 수 있다. 대양리는 마을 뒤 남쪽으로 산이 있고 북쪽에서 보청천이 흘러가기 때문에 북쪽을 향한 배산임수 형국을 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들이 넓게 발달되어 있어서 옛날부터 부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너른 들 건너 동북쪽으로 구병산이 동서로 펼쳐져 있어 전망도 기가 막히게 좋다. 마을로 들어가면서 감자를 캐는 노부부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올해는 날이 가물어 감자 수확이 시원찮다고 말한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크다고 대꾸를 하니, 상품성이 별로 없어 팔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대양리 수피 마을에서 감자를 캐는 노부부
 대양리 수피 마을에서 감자를 캐는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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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피 마을을 거쳐 보청천 위에 놓인 대양교를 건넌다. 지금과 같은 영구적인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 사람들은 이곳에 놓인 다리를 문앞 다리라고 불렀다. 탄부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면 완전히 들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산길을 걸었다면 이제부터는 들길을 걷는다.

들판을 지나다 보니 특이한 비닐하우스가 하나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못자리 뱅크다. 못자리 뱅크란, 전체 예산 2억7천2백만 원의 80%를 도비와 군비로 지원 받아 모내기에 사용하는 육묘상자를 생산하는 사업이다. 시행년도가 2009년이고, 사업자는 숲피 영농조합법인 김문식이다. 사업은 2009년 5월 11일 끝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아직도 내가지 않고 버려진 육모상자가 그대로 있다. 이게 바로 국비 사업의 실상이다.

버려진 육묘상자
 버려진 육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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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를 지나자 숲이 잘 발달된 작은 동산이 하나 나온다. 이 숲 동산 때문에 수피라는 마을이름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숲을 돌아 우리는 구암리 마을로 향한다. 구암리(九岩里)는 한자로 풀이하면 9개의 바위가 있는 마을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거북바위를 뜻하는 구암(龜巖)이라는 한자를 쓰기도 한다. 거북바위는 현재 이상규씨집 마당에 있다.

구암리에 들어서자 마을 공동 우물터가 보인다. 구암리는 구바우, 안말, 중관말, 하관말의 네 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70세대에 17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우리는 구암리 앞으로 지나는 502번 지방도로 나간 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곳에는 우리를 보은 동학순례길로 안내할 박달한씨가 벌써 나와 있다.

의병장 이명백 이야기

보덕중학교
 보덕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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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우리는 하장리에 있는 보덕중학교 쪽으로 길을 잡는다. 보덕중학교는 탄부면과 마로면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중학교로 1953년 생겨났다. 현재 각 학년 1학급씩 3개 학급에 73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보덕중학교를 가기 전에 퇴락한 정려가 하나 눈에 띈다. 가까이 가 보니 이명백(李命百)장군 정려각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옆에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명백장군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휘하에서 충의장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중봉이 금산전투에서 순국하자, 그 뜻을 이어 의병 300명을 이끌고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지은 시구 '일일산하기 삼군사직심(一釰山河氣 三軍社稷心)'이 <가평이씨세보>와 <보은군지>에 전해진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둔한 칼은 산과 강의 정기를 받고, 온 군사들은 오직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뿐이네'가 된다.

의병장 이명백장군 정려
 의병장 이명백장군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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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3월 11일 이명백장군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이곳 마로면 적암리로 회군하여 충군애친(忠君愛親)의 도리를 다하기로 한다. 4월 18일 행주산성 싸움에서 패한 왜군이 보은 쪽으로 퇴각하다 마로면 적암리에서 이명백의 의병과 맞닥뜨렸고,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의병이 전멸하고 말았다. 당시 싸움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바위를 붉게 물들였고, 그 후 이들의 충절을 기려 마을 이름도 적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1792년 보은의 유림들이, 1797년에는 보은현감이 장군의 공을 기려 상소를 올렸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1812년(순조 12년) 예조로부터 절충장군 증직과 함께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은(報恩)의 고 부호군 이명백(李命百)이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으로 왜변(倭變) 때 창의(倡義)하여 보은을 지키다가 적암(赤巖) 전투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태그:#고백이재(만월재), #오구내재, #비조티(수피재), #탄부면, #이명백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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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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