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 앞.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 앞.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24일 오전 8시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 황이숙(가명·59)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게 문을 열었다. 강동구는 지난 11일 천호신시장과 동서울시장(아래 천호신시장 통칭)에 정기 휴무일을 둘째·넷째주 일요일에서 첫째·셋째 일요일로 변경하라고 했다. 시장 휴무일이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과 겹치니 이마트 천호점이 쉬는 날에 맞춰 시장 문을 열라는 얘기였다.

황씨는 이날 매출에 큰 기대를 걸었다. 단 1000원이라도 좋았다. 이마트처럼 거대 기업에는 종이 한 장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절박한 수입이었다. 20년 전인 1992년 이마트에 앞서 신세계백화점이 생긴 이후 황씨네 가게에는 늘 생닭 냄새 맡은 파리만 찾아왔기 때문이다.  

"40년 유지된 휴일 옮겼는데..." 천호신시장 상인들 '황당'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에서 한 가게 주인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다.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에서 한 가게 주인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다.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상했다. 이날도 오후 1시가 지나도록 손님 한 명 오지 않고 파리만 날렸다. 간혹 수첩 들고 취재하는 기자들만 서너 차례 지나다녔다. 그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기자는 "법원 결정으로 오늘부터 강동·송파구 대형마트들이 영업을 재개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30년 동안 닭을 팔면서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법원이 왜 그런 판결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형마트 생기고부터 몇 백만 원 나가는 월세 내기도 벅찬 그였다.

대형마트보다 훨씬 절박한 처지를 무시하는 법원을 생각하며 황씨는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지금 당장 가게 구석에 있는 석유통을 들고 이마트로 갈까 고민도 했다. 그러다가 곧 체념했다. 결국 세상은 돈 많은 사람의 편을 들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도 서민이 죽고 부자가 이겼다.

지난 22일 서울행정법원 판결에 따라 서울 강동·송파구 대형마트 일요일 영업이 재개되자  혼란스러운 건 황씨만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동구 천호신시장에는 5분 간격으로 손님 1~2명만 지나다녔다. 상인 서너 명은 길 중턱에 모여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당황스럽다"는 말을 되뇌었다.

신발가게 주인인 김영식(70)씨는 "우리는 첫째·셋째주 일요일에 쉬던 일정을 옮길 정도로 노력하는데 대형마트는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며 힐난했다. 그는 "대형마트 생기기 전에는 시장 장사가 잘 돼 다들 가게 자리 비는 것만을 노렸다"며 "그런데 지금은 주변 대형마트·백화점에 둘러싸여 수입은커녕 월세에 허덕인다"고 털어놨다.

한달 격주 휴무가 전통시장 수입 증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에 김씨는 "대형마트가 한번이라도 쉬면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 된다"며 "대형마트 휴무 효과 좀 보나했는데 이제 소용없다"고 말했다.

참기름을 파는 손안심(57)씨도 "대형마트가 영업을 안 하면 급한 사람들은 어쨌든 시장에 와서 뭔가 사게 돼 있다"며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팔길 원한다"고 답했다.

무작정 시장 영업 일정을 바꾼 강동구를 향해 날 선 비판을 하는 상인도 있었다. 해산물을 파는 김아무개(36)씨는 "40년 넘게 지속된 휴무 일정을 바꿨는데 이제 와서 대형마트에서 주말영업을 재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추진한 강동구도 문제 있다"고 꼬집었다.

대형마트 직원 "딸과 얼굴 보는 주말 사라져... 기업 횡포"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오석준 부장판사)가 지난 22일 롯데쇼핑ㆍ이마트ㆍ홈플러스 등 5개 업체가 송파ㆍ강동구를 상대로 낸 '영업제한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측 손을 들어준 가운데, 24일 오후 정상영업 안내문이 내붙은 이마트 천호점에서 고객들이 물건값을 계산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오석준 부장판사)가 지난 22일 롯데쇼핑ㆍ이마트ㆍ홈플러스 등 5개 업체가 송파ㆍ강동구를 상대로 낸 '영업제한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측 손을 들어준 가운데, 24일 오후 정상영업 안내문이 내붙은 이마트 천호점에서 고객들이 물건값을 계산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같은 시간 천호신시장 앞에 자리한 이마트 천호점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건물 밖 도로에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매장 역시 사람끼리 스치며 지나갈 정도로 붐볐다. 스피커에서는 '특별 세일'을 알리는 방송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1층 매장에서 일하는 60대 민서혜(가명)씨는 연신 한숨을 쉬며 진열대를 정리했다. 그는 활발한 매장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모처럼 얻은 주말 휴일인데 도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민씨에게 주말 휴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었다. 얼굴 보기 힘든 31살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밥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매달 둘째, 넷째 일요일은 직장 다니느라 주말에만 시간이 비는 딸과 얼굴 마주할 유일한 기회였지만 이날 영업 재개로 다시 빼앗긴 것이다.

민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형마트에서 구매할 사람들은 토요일에 미리 사둘 터였다. 대형마트에서 월 2회 쉰다고 매출에 타격이 있을 정도인지 의문이었다. 그에게 대형마트 영업 재개는 돈 많이 버는 회사의 횡포였다.

민씨와 마찬가지로, 대형마트 안에도 갑작스런 영업 재개 결정에 한숨 쉬는 직원들이 몇 명 있었다. 특히 슬하에 자녀를 둔 직원들은 가족과 주말에 보낼 시간을 잃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3층 매장에서 일하는 50대 김아무개씨는 "직원 입장에서는 (평일보다) 주말에 쉬는 게 좋다"며 "집에서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 좀 먹이며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고 답했다.

시간제 근무 중인 50대 유아무개씨는 "다른 대형마트는 아직 주말에 격주로 쉬는데 우리만 일하니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손님들 "대형마트 더 편해" vs. "휴무일 더 늘려야"

한편 이날 오후 이마트 천호점을 찾은 시민들은 대형마트의 주말영업 재개를 환영했다. 유은정(34)씨는 "과일이나 야채는 시장이 싸지만 기저귀 같은 공산품은 대형마트가 훨씬 싸다"고 했고 박양희(75)씨는 "여러 물건이 한 데 모여 있어 편리하고 실내라 시원해서 장보기 좋다"고 답했다.

또한 중소상인 보호를 위한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동의하면서도 주말 격주 휴무의 실효성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박양희씨는 "중소상인들 어려운 건 알지만 대형마트가 하루 이틀 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권아무개(59)씨도 "대형마트가 쉬면 손님이 덜 오긴 하겠지만 월 2회는 부족하니 휴무 기간을 더 늘려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그:#대형마트, #전통시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