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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8일과 10일, 홍대 부근 일대의 클럽과 야외에서 금지곡 콘서트가 열렸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체제 하에서 금지곡이 됐던 노래들을 요즘 세대의 젊은 음악인들이 새롭게 해석해 부르는 콘서트다. 이 콘서트는 의미심장하게도 6월 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생각해 보면 대중의 의식과 감성까지 통제하려 했던 군사 독재 시대의 유물인 금지곡만큼 민주주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게 하는 게 또 있겠는가.

70년대 금지곡 하면 우선 떠오르는 건 물론 당대 대학생들의 감성과 정신을 보여줬던 일군의 통기타 음악이다.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청년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대변하는 뛰어난 작가적 뮤지션들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뮤지션을 꼽는다면 모던포크의 기수였던 김민기와 한대수, 청년문화의 울타리를 넘어 스타로까지 도약했던 송창식과 이장희, 그리고 한국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 청년 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많은 노래가 금지곡의 사슬에 묶임으로써 70년대 청년문화의 정치성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긴급조치 9호... 청년문화 시대 막 내리게 해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 긴급조치 9호 발동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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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전체를 일사불란한 병영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대학생 집단은 가장 큰 반대세력이었고, 이들의 문화는 체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방종으로 인식됐다. 군사정권은 이미 70년대 초부터 대중음악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며 금지곡을 양산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1975년에는 문공부가 나서서 아예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며 222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어 '방송윤리위원회(방륜)'이 <고래사냥> <아침이슬> 등에 대해 추가 금지 조치를 행하게 된다. 그 해 말에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과 함께 청년문화의 주역 대부분이 활동을 정지당하고 방송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7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통기타 음악과 청년문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김민기의 경우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은 공식적으로 <아침이슬>뿐이었지만 사실상 그의 이름을 건 모든 작품이 음으로 양으로 금지돼야 했고, 한대수의 경우도 <물 좀 주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이미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도 금지됐고, 신중현의 <미인> <거짓말이야> 등 많은 노래도 금지됐다. <거짓말이야>의 금지 사유가 '불신 풍조 조장'에 있었다는 건 그 시대를 함축하는 코미디였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미인> <고래사냥> 등 이미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노래를 금지시킨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당시 심의위원은 "가사나 곡 자체는 문제점이 없으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좋지 못한 점을 감안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불건전하게 바꿔 부른다는 게 이유였다. 음악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노래가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사후 결과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한국 가요만 탄압 받은 게 아니었다

퀸의 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 동상
 퀸의 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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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사슬은 국내 가요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구미의 많은 팝음악들이 이른바 가요정화를 위한 금지의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금지의 사유는 크게 ▲ 혁명 고취 및 불온물 ▲ 퇴폐 저속 외설작품 ▲ 마리화나 음악 등이었다.
존 바에즈의 'We Shall Overcome'과 밥 딜런의 'Blowing in the Wind'는 '반전'으로, 비틀즈의 'Revolution'과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은 '불온'으로, 맬라니 사프카의 'Lay Down'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Plastic Fantastic Lover'는 '불건전'으로, 시카고의 '25 or 6 to 4'와 템테이션스의 'Psychedelic Shack'는 환각으로, 조니 미첼의 'Woodstock'은 '퇴폐'로 각각 금지당해야 했다.

일부 곡이 금지되면 앨범 발매가 정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유명한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와 'A Day in the Life'가 빠져야 했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Greatest Hits'에는 'Cecillia'가 없으며, 퀸의 'A Night at the Opera'에는 'Bohemian Rhapsody'가 없고 딥 퍼플의 'In Rock'에는 'Child in Time'이 빠져야 했다.

대부분 해당 앨범의 핵심적인 곡들이었으니 한국의 팝음악 팬들은 이 시기 팝음악의 정수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셈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이른바 '빽판'이라 불리는 불법복제판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금지곡에는 월북 작가의 작품이나 트로트 가요들도 적지 않았고 록 계열 음악도 있었다. 대마초 파동 역시 록 음악인들과 통기타 쪽에 두루 걸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요 재심사나 대마초 파동이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도전을 엄단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해 이른바 국민총화를 달성한다는 군사정권의 정치적 전략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이다.

청년문화가 '척결 대상'이었다니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70년대 대학생 계층에 의해 주도된 청년문화, 특히 통기타와 록음악이 단지 일부 계층의 소비문화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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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사정권의 경직된 시각에서는 청년세대의 최소한의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대학가를 장악했던 청년문화는 이른바 국민총화를 해치는 '불온'과 '퇴폐'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김민기와 이장희의 '차이', 심지어 신중현과의 '차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모두가 '국민총화를 해치는 척결 대상'이었을 뿐이다.

6월 8일과 10일의 금지곡 콘서트를 찾은 젊은 세대는 그들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금지곡의 시대를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노래들이 금지된 사유를 들으면서 아마 배꼽을 잡고 웃거나 어이없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수십 년 전에 있던 어처구니없는 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도 될 만큼 지금 우리의 현실이 편안하지 않다. 금지곡의 칼날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딸이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심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아버지 시대에 남발됐던 금지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5·16을 구국의 혁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금지곡도 유신체제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국민총화를 위해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창남씨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금지곡, #통기타음악, #청년문화의 정치성,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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