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성미산마을지역화폐 '두루' 두루두루 쓰임새가 많아지길 바란다
ⓒ 한진숙	관련사진보기

엄마 옷 사줘/ 입을 게 없단 말야/
너 팔아서 사줄까/ 돈 없다
(엄마 옷 사줘/임길택 노래상자)

거실 오디오에서 '굴렁쇠아이들' 노래가 경쾌하게 울린다.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따라 부르는 록 동요. 세 아이가 나를 보고 소리 지르듯 합창한다. '엄마! 옷 사줘! 입을 게 없단 말야' 내가 턱을 치켜들고 화답한다. '너 팔아서 사줄까? 돈 없다!'

"더운 데 반바지도 없고..." "나는 레이스 치마도 없고 다 바보 같은 옷밖에 없어." "난 껴안고 자는 인형!"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아이들의 옷 타령이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물만 먹어도 크는 듯한 큰 녀석 옷은 철마다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보이시한 언니 옷 물려 입기에 신물 난 둘째 녀석은 요즘 레이스 걸로 거듭나는 중이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둥 한참 쫑알거린다. 막내 놈은 뜬금없이 인형 타령이다. 자기 키 만한 크기에, 다리까지 올리고 잘 수 있는 기다란 인형을 사 달란다. 집에 있는 인형들이 내뿜는 먼지 때문에 내 코는 비염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는데, 또 인형을?

"돈 없다!"

우리 동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돈... '두루'로 분홍 원피스 샀다 

큰사진보기
▲ 500두루로 원피스 장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원피스가 이제 우리 아이의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현금 5백원과 5백두루를 지불했다. 리본 달린 어깨끈이 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 한진숙	관련사진보기

아이들한테 쐐기를 박긴 했지만, 아이들 시선을 피해 지갑을 열어본다.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 장 그리고 삼천오백 '두루'가 있다. 앗싸!

'두루'는 우리 동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돈, 그러니까 지역화폐다. '두루'는 마을 입구에 있는 재활용가게 '되살림'에 물건을 주고 돈 대신 받는다. 몇 달 전에 뽀로로 블록 한 상자를 '되살림'에 주고 천 '두루'를 받았다. 그 한 달 전에는 막내 녀석이 입던 옷과 신발을 정리해 '되살림'에 맡기고 '두루'를 받았었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고, 뽀로로 블록 기차는 건전지를 끼우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으로 갖다 놓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새 주인을 만났다. 막내가 세 살 때 입고 나가면 앙증맞기 이를 데 없었던 여름 카디건도 재빨리 팔렸다. 이제 내가 '되살림'에서 필요한 물건을 살 차례다. '되살림'에 따라간 둘째 녀석은 치마 하나를 골랐다. 레이스는 없었지만, 옅은 분홍색이고 가느다란 끈이 달려있어 아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옷에 천 원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다.

안타깝게도 큰 아이 반바지와 인형은 없다. 보는 동안 '지름신'이 내려서 내 티셔츠와 큰 아이가 입기 좋을 소매 없는 티셔츠를 골랐다. 총 4천 원. 2천 '두루'와 현금 2천 원을 낸다. '되살림' 물건은 '두루' 절반, 현금 절반으로 살 수 있다. 지갑에 있는 현금으로 그만큼 사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비싸야 2천 원하는 '되살림' 옷을 산다면 '두루'와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충분하다.

당장 입어야 하는 반바지는 결국 새로 샀다. 카드를 쓰려고 하니, 속이 좀 쓰리다. 막내 아이가 찾는 인형은 좀 기다려볼 참이다. 껴 안는 인형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어떤 아이가 '되살림'에 인형을 맡기는 날, 우리 막내는 환호성을 지를 테지.

'두루'로 쓸모없어진 물건 팔 수 있고, 필요한 것 얻을 수 있다 

큰사진보기
▲ '두루'장부 되살림에서 관리하고 있는 내 '두루'장부다. 쓸만한 물건을 가져가면 돈 대신 두루를 지급해주고 장부에 기록을 남긴다. 두루를 받지 않고 기증하는 경우도 많다.
ⓒ 한진숙	관련사진보기

우리 동네 지역화폐 '두루'는 '되살림' 가게가 만들어지던 2007년 겨울에 생겨났다. 옷, 책, 신발, 가방과 놀이감, 학용품, 주방용품, 전자제품 등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가게에 가져가면 돈 대신 '두루'를 지급한다. '두루'는 우리 동네서만 사용할 수 있고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미니샵에서 커피를 사 먹거나 마을극장 공연 볼 때도 돈 대신 사용한다. 작년에 생긴 동네책방 개똥이네 놀이터에서 책을 살 때도 '두루'를 쓴다. 물론 전액 현금처럼 사용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쓸모가 없어진 물건을 주고받은 '두루'로 팔 수도 있다. 또, 내가 필요한 무엇인가를 '두루'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대공황 시기 1930년대 오스트리아 300개 이상 지역에서 사용된 지역화폐 '뵈르글(worgl)'은 지역에서 활발한 경제적 순환을 이뤄내고, 이것이 힘이 되어 미증유의 대공항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니 지역화폐의 역사는 꽤 거창한 셈이다.

현재 영미권 국가 1000여 개 지역에서 지역화폐가 사용되고 있고, 우리나라 지역화폐 중에는 대전한밭레츠 '두루'가 유명하다. 최근에 마산과 춘천에서 지역화폐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을만들기를 하면서 지역의 노동력과 물건을 순환시키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데 지역화폐가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마을 '두루'를 보면 지역화폐의 힘과 한계가 뚜렷해진다. 지갑에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돈이 부족해도 동네서 현금으로 우대받는 '두루'는 내 지갑을 두둑하게 만든다. '되살림'에 가져간 아이 장난감이 내가 읽고 싶던 로맨스 소설 한 권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만드는 것이 '두루'다.

'두루'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힘을 지닌다. 내가 충분히 다시 쓸만한 것들만 챙겨 '되살림'에 가져가는 것처럼 동네 아줌마들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부터 만들어내고 나를 떠난 물건이 누군가에게 요긴한 것이 된다는 뿌듯함을 선물한다. 이것은 나눔의 모습이고, '두루'를 같이 사용하는 동네 사람들을 끈끈하게 연결하는 튼튼한 다리가 된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제적 의미만큼이나 실감 나는 것이 '두루'의 힘이다. 

안타까운 것은 '두루'가 통용되는 곳이 많지 않은 것. 내가 사용한 '두루'를 받은 동네책방이 '두루'를 사용할 곳이 별로 없다. 직원에게 '두루'를 월급으로 지급한다면 직원은 옷이나 책을 살 수는 있지만, 월세를 낼 수도 없고 식품을 살 수는 없다.

'두루' 사용처 한정 아쉽지만, 앞으로 가맹점 다양해지길...

화폐 사용의 기본은 순환성에 있는데 그 부분이 막혀있는 형국이다. '두루'가 물품 구매에만 집중된 점도 아쉽다. '두루'는 지역화폐 특성상 '의미와 목적에 동의하는 관계를 한 곳'에서 화폐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두루' 사용처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다음 달 중순부터 마포희망나눔에서 회원들에게 '두루'를 발행하는데, '두루' 가맹점이 꽤 다양하다. 홍대 근처에 있는 치과, 동네에 있는 약국, 두리반 칼국수집 등등. 그 치과 원장은 얼마 전 있었던 마포의료생협 창립총회에서도 보았던 분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치과 치료를 포기하는 쓸쓸한 풍경이 줄어드는 일은 희망적이다. '보험이 되지 않는 교정치료비를 절약할 수 있겠네~' 싶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희망나눔 회원가입부터 해야겠다. 나 같은 후원 회원들이 늘어나면 희망나눔은 마을로 환원하는 나눔 사업을 더 많이 할 것이고, 그 수혜는 또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내 지갑에 들어 있는 '두루'가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