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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었다. 사진은 고인이 생활했던 방의 모습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고 김화선 할머니는 1941년 싱가포르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뒤 귀국해 대전에서 생활해오다 2008년 11월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한 뒤 지난 13일 별세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었다. 사진은 고인이 생활했던 방의 모습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고 김화선 할머니는 1941년 싱가포르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뒤 귀국해 대전에서 생활해오다 2008년 11월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한 뒤 지난 13일 별세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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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화선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나눔의 집으로 들어오자 한 자원봉사자가 영정사진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고 김화선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나눔의 집으로 들어오자 한 자원봉사자가 영정사진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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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방이다. 여기저기 갈라진 목제 화장대는 한쪽 다리가 없어 기울어져 있다. 요즘 보기 어려운 브라운관식 뚱뚱한 TV에는 방을 비운 며칠 사이 먼지가 앉았나 보다. 옆으로 병원용 침대가 놓였고 그 위에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 올려놨다. 화장대 거울에는 할머니가 직접 그린 연꽃이 붙어 있다. 그림에 적힌 이름은 '김화선'(86). 방에는 여전히 보일러가 들어와 '뜨끈'했고 할머니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났다.

15일 오전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일째,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노제가 열렸다. 생의 마지막 3년을 보낸 이곳에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전까지 김 할머니는 대전에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전에 살기 전, 해방이 될 때까지 할머니는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4년이나 타향에 머물렀다. 그곳에 갈 때는 나이는 15살, 평양에 살고 있었다.

"외로움을 타던 사람... 편안히 있어"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자원봉사자들이 헌화와 절을 하고 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자원봉사자들이 헌화와 절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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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몇 번째'라고 번호를 붙이는 것은 곤혹스럽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들 앞에 '몇 번째'를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 남아 있는 죽음을 세는 것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이제 '몇 명'이 남았다고 말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김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 머물렀던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9번째로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눔의 집에는 8명, 일본 중국을 포함해 국내 외에는 60여 명의 위안부 피해자만이 남아 있다.

그의 부고에 온라인에서 추모가 이어졌던 것과 달리 할머니의 장례는 조촐했다. 가족이 없는 김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을 위안부 피해자 박옥선, 김순옥, 김군자 할머니와 자원봉사자 등 20여 명이 맞이했다. 나눔의 집 관계자는 "많이 오실 거라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평일이고 해서 어려웠던 거 같다"며 아쉬워했다.

"늘 혼자 생활을 해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일본어와 영어로 유창하게 인사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으며 금방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소탈한 분이다."

나눔의 집 한쪽에 걸려있는 김화선 할머니 소갯글이다. 사진 속 할머니는 웃음이 많았고 짙은 눈썹 문신이 상징처럼 보였다. 노제 중간 나온 생전 영상에서 보인 그의 노래 솜씨도 뛰어났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로 시작하는 노래를 맛깔나게 불렀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함께 생활했던 김군자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함께 생활했던 김군자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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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들 사이에 사실상 '대장'이라는 김군자 할머니는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왜 이렇게 빨리 가니. 왜 이렇게 고생만 하고 가니. 그래도 여기서 아프고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 사람들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했어. 가서 편안히 잘 있어." 할머니는 결국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의 영정이 끝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고시원 같이 작은 방은 비루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눔의 집에 또 하나의 빈방이 생겼다.

"위안부 문제, 발로 뛰는 정치인 필요하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장례식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발인이 엄수된 가운데 박재홍 나눔의 집 간사가 영정사진을 모시고 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장례식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발인이 엄수된 가운데 박재홍 나눔의 집 간사가 영정사진을 모시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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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차가 화장을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으로 향했다. 화장시간을 기다리며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을 만났다.

그는 "김화선 할머니를 모시려고 대전에 세 번 내려갔었다, 우리가 보기에 혼자 사는 게 어려웠는데 본인은 괜찮다고 했다"며 "나눔의 집에 있으면 의사도 있고 식사도 잘 챙겨 드실 수 있다고 세 번이나 찾아가 겨우 설득해 모셔온 게 2008년 11월"이라고 말했다. 안 소장은 "정이 많아서 봉사자나 방문객들이 오면 금방 친해지고 잘 대해줬다"고 기억했다.

한국에서 일본의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은 대략 20여 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93년 '위안부생활안정지원법'이 시행되면서 그해 등록한 숫자는 154명. 여태까지 총 254명이다. 그 가운데 60여 명이 생존해 있다.

안 소장은 "아무래도 아픈 기억이고 또 상처를 받을까봐 피해자들이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며 "우리 사회가 여성인권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손가락질 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이 위안부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밝히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위안부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갔다'거나 '돈을 벌려고 그랬다'는 식의 시선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공식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에 "결국은 정치적 방식으로 풀리겠지만, 단지 정치권에서 선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며 "오히려 시민들이 더 나서야 한다. 한국 시민이 일본 시민을 설득할 수 있을 때 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위패와 영정사진이 먼저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곁을 지나고 있다.
 15일 오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화선 할머니의 노제가 엄수되는 가운데, 위패와 영정사진이 먼저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곁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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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 것에 안 소장은 "선언적인 발언 이후 실제적인 변화가 전혀 없다"며 "그냥 때때로 화제가 되면 말 한마디 하는 게 아니라 발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한일정상회담에서 처음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고 지난 3.1절 기념축사에서도 이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안 소장은 "일본의 여성의원들은 지난 2001년부터 전쟁시 여성인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지속적으로 제출하고 있다, 미국의 국회의원들도 나눔의 집을 방문해 여성인권 문제를 조사한다"며 "우리나라 어느 정치인도 그런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관심이 가장 큰 적"이라며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서대문형무소, 안중근 기념관 그리고 위안부 역사관(나눔의 집과 같은 곳에 위치)을 방문하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지시한 자원봉사 때문에 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어른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시민의 더 큰 관심을 호소한 것이다.

참고로 위안부 역사관의 입장료는 2000원이다. 경기도 광주까지는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두 시간 안쪽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는 20일, 1027회 수요집회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다는 것도 알아놓자.

김화선 할머니 유해는 화장 후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된다.


태그:#위안부, #김화선, #나눔의 집, #일본,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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