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바지 9000원', 아울렛에서 이 팻말을 보고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아이를 낳고 예전 몸무게로 돌아가길 기다린 지 3년여.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함에도 한두 치수  더 큰 바지를 사는 걸 차일피일 미뤄온 터였다. 일상도 마찬가지. 매달 쏟아지는 직장일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 돌보기, 소소한 집안일까지 직장맘으로 살아가느라 '나'를 돌보는 건 늘 뒷전이었다. 점점 '나'는 희미해져 갔다.

한 번에 바지 세 벌을 샀다. '나 좀 돌아봐 달라'는 내 안의 목소리에 응하기로 맘먹은 게다. 나만의 휴가를 갖기로 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남편에게 3박4일 여행을 다녀올 테니 애를 잘 보고 있으라고 통보했다.

아들과 '쿨'하게 작별

여행준비는 간단했다. 바지와 함께 점퍼 한 벌 산 게 다였다. 여행경로도 출발 전날 정했다. 지도를 쫙 펴놓고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네 곳을 찍었다. 청산도, 해남 땅끝마을, 보성 녹차밭, 부안 변산반도. 여백을 많이 남겨놓기로 했다. 여행의 묘미는 의외의 마주침이니까. 실은 귀차니즘이 작용했다. 별별 여행정보들을 검색하는 고된 노동을 하기가 귀찮았다. '무작정 떠나자. 떠나면 볼 것, 잘 곳은 어디든 있겠지'라는 '무데뽀' 정신이 여행의 설렘 앞에 빛났다.

드디어 여행이다,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여행 출발일인 5월 25일은 아이의 어린이집 소풍날이었다. "(당신이) 소풍 도시락을 싸면 어린이집 차 태우는 건 (내가) 하겠다"는 남편의 제안에 토를 달지 않았다. 회사 지각까지 감수한 남편에게 도시락까지 싸는 '완벽한 남편상'을 요구했다가 그냥 출근한다고 하면 나만 손해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달걀도 삶고 과일도 깎았다. 보리차를 담은 물통도 식탁에 올려놨다.

이제 집을 나설 시간이다. 소풍 간다고 일찍 일어난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결이야, 오늘은 엄마가 일찍 가야해. 소풍 잘 다녀오고. 저녁에도 아빠가 데리러 가니까 아빠랑 재미있게 놀아. 알았지?"

아이가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여행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결이가 어린이집에 갔다가 들리는 친정집에 그대로 전해 엄마아빠에게 한소리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이는 아침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아빠가 전날 집에서 맥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등 시시콜콜한 - 특히 우리 부부가 감추고 싶은 - 것들을 다 말하는 '순진한' 다섯 살이니까. 아들은 '쿨하게' "안녕"했다. 즐거운 소풍날이니까.

고속버스에 올랐다. 거리 위 사람들은 저마다 학교로, 일터로 바쁘게 향하고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고속도로로 향하는 내 맘이 뻥 뚫렸다.

청산도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을 찍다

집을 떠난 지 8시간 만에 청산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집을 떠난 지 8시간 만에 청산도로 향하는 배를 탔다.
ⓒ 신정임

관련사진보기


첫 여행지, 청산도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광주에서 완도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완도에서 다시 청산도로 가는 배를 타니 집을 떠난 지 8시간이 훌쩍 넘었다. 페이스북에 전라도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올렸다. 한 페북 친구가 "미래를 위해 남겨놓은 땅 전라도 구석구석을 다녀보라"며 완도 진도 강진 장흥 벌교 보성 등을 추천했다.

귀 얇은 아줌마, 지도를 편다. 여행경로를 살폈다. 강진 다산초당,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을 경로에 더하기로 한다. 그 사이 바다 위를 50여 분 가른 배가 청산도 포구에 닿았다.

청산도 포구에서 놀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청산도 포구에서 놀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 신정임

관련사진보기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청산도 관광안내도를 보니 지리청송해변의 석양을 추천한다. 그쪽으로 가서 숙소를 잡기로 마음먹는다. 방문자센터에 물으니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하단다.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길옆에 세워진 배 안에서 웃통을 벗은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 뒤로 야트막한 산과 알록달록한 집들이 보인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오늘만큼은 나도 영화 속 여행객이란 배역을 맡는다.

풍경을 눈 속에 담으며 섬길을 걷는다. 새들의 지저귐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골목에서 마주친 초등학생이 꼭 옆집 아줌마에게 인사하듯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낯모른 이의 환대에 여행객은 금세 달뜬다. 발걸음이 가볍다. 씩씩하게 걷는다. 그것도 잠시, 가도 가도 바다가 나올 기미가 없자 슬쩍 불안해진다.

혹시 걸어서가 아니라 차로 20분은 아니겠지. 마음에서 피어나는 의심을 누르면서 언덕을 넘고 있는데 작은 트럭 한 대가 옆에 선다. 운전석을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지리해수욕장에 가? 타요, 태워줄게" 하신다.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다리도 좀 아팠다. "고맙습니다" 하고 냅다 트럭문을 열었다.

트럭도 지체 없이 출발했다. 할머니는 시원시원한 광주 어머니였다. 방을 구했냐는 질문에  "아직"이라 답하니 "나 청산도에서 제일 좋은 펜션 해" 하신다. "침대도 모두 일본 히노끼(편백나무)로 만들었어. 바다 바로 옆에 있어서 경치도 좋아. 우리집에서 안 자도 좋으니까 이따 구경하고 가." 어머니의 쏟아지는 펜션 자랑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방값을 물으니 "혼자 왔으니까 싸게 해줘야겠지? 그래도 5만 원 이하는 안 돼. 민박도 최하가 4만 원이니까. 대신 아가, 쌀하고 김치 줄 테니까 밥 해먹어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가'라는 정감 있는 호칭에 마음이 이미 넘어갔다. 어머니는 재차 "우리집에서 안 자도 좋으니까 구경하고 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라고 말씀하신다.

해변을 독차지하고 해를 동무삼아 걷는 길

해질녘의 지리청송해변. 바다를 통째로 독차지하는 기쁨도 맛봤다.
 해질녘의 지리청송해변. 바다를 통째로 독차지하는 기쁨도 맛봤다.
ⓒ 신정임

관련사진보기


트럭이 덜컹거리며 지리청송해변으로 들어선다.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바다다. 그 바다 오른쪽 끄트머리에 광주 어머니의 펜션이 있다. 펜션에 도착해 방을 살폈다. 작은 황토방이다. 어머니가 자랑한 편백나무 침대가 놓여있다. 조그만 창밖으로 바다도 보인다. 어머니는 꼼꼼하게 살피라고 했지만 1분 만에 결정했다. 첫날밤은 좀 과용하지 뭐.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이 내 지갑을 열게 했다.

"아가, 쌀은 저기 들어가서 퍼 가라."

어머니는 처음 보는 내게 거리낌 없이 집에 들어가라 하고, 나도 어머니의 손녀딸 이름의 팻말이 달린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누가 믿지 못할 세상이라 했던가. 아직은 믿을 만한 세상이다.

밥솥에 밥을 안치고 해질녘의 바닷가로 나갔다. 낙조가 일품이라고 홍보하는 바닷가다. 어스름한 해변에 아무도 없다. 바다를 통째로 독차지하는 호강을 누린다. 펜션에서 들려오는 광주 어머니의 북어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찰랑찰랑 거리면서 물가를 걸었다. 해변을 여러 모양으로 수놓은 조개껍질들도 주었다.

청산도 슬로길 10코스, 노을길에서 본 노을.
 청산도 슬로길 10코스, 노을길에서 본 노을.
ⓒ 신정임

관련사진보기


한참 놀았는데도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해가 안 오면 내가 찾아가지 뭐. 길 위에서 석양을 만나도 좋을 것 같아 걷기로 한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청산도엔 슬로길이 있다. 지리청송해변을 통과하는 슬로길 10코스, 노을길 위에 섰다. 마침 노을이 보일 시간이어서 열심히 걸었다. 점점 땅과 가까워지는 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야트막한 산을 넘고 논길을 지났다. 떨어지는 해와 동무삼아 걷는 길, 가슴도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청산도 선착장에서 볼 수 있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청산도 선착장에서 볼 수 있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 신정임

관련사진보기


중간 쉼터에서 페북을 보니 남편이 낙조는 꼭 빨간 등대에 가서 보라는 댓글을 달아 놨다. 청산도는 3년 전 갓난아이와 씨름하는 부인님을 나 몰라라 하며 혼자 여행을 떠났던 남편이 왔던 곳이다. 첫여행지로 청산도를 택한 데는 남편의 강추가 한몫 했다. 빨간 등대는 또 어디야, 하며 검색을 했다. 바로 배에서 내렸던 선착장 근처에 있단다.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노을길에서 멀지 않아 슬로길 콘셉트에서 벗어나 좀 빨리 걸었다. 해가 곧 떨어질 것 같아서.

선착장까지 왔다. 빨간 등대가 보여 가려고 했더니 연결된 길이 없다. 한참 돌아가야 한다. 빨간 등대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사라질 것 같아 가기를 포기한다. 사실은 1시간 가까운 도보로 다리가 아팠다. 해넘이 보기엔 선착장도 나쁘지 않았다. 멀리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로 해가 점점 사라져갔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빛에 반해 열심히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엔 장비와 사진사의 실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작은 두 눈과 마음 한 구석에 고이 담아두기로 한다.

펜션으로 돌아와 설레는 첫날밤을 맞았다. 광주 어머니가 주신 몇 가지 반찬과 맥주 한 캔이 전부인 밥상이지만 9첩 반상이 부럽지 않다. 홀로 맥주를 들이켜면서 노트북에 담아온 지난 드라마를 보는 맛도 쏠쏠. 어느새 창밖으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태그:#청산도, #지리청송해수욕장, #슬로길, #노을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