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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탐식가들>
 <조선의 탐식가들>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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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라 하겠습니까. 섬 안에 산개(山犬)가 백 마리 아니라 천 마리도 넘을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개고기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개를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장·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의 개고기 요리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조선의 탐식가들> 중에서)

1811년 겨울, 유배지의 정약용이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 정약전에게 편지로 알려준 개고기 요리법이다. 여기서 박초정은 박제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정약용이 형에게 알려주고 있는 개고기 요리법은 박제가가 이미 정약용에게 알려준 박제가식 개고기 요리법인 것이다.

정약용은 요리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산개를 잡는 묘안까지 자세히 설명한다. '섬(흑산도) 안에 활과 화살, 총과 탄환이 없다고 해도 덫이나 그물은 설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개를 잡을 수 있는 덫을 놓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먼저 개의 머리가 완전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개밥 그릇 하나를 만든다. 그 그릇의 사방 가장 자리에는 두루 송곳처럼 곧은 쇠못을 밑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박는다. 그 그릇 안에 뼈다귀나 밥 같은 미끼를 넣고 개가 잘 다니는 곳에 놓아둔다. 그렇게 하면 개가 미끼를 먹으려고 머리를 넣었다가 쇠못 때문에 머리를 빼내지 못하고 "공손히 엎드려 꼬리만 흔들 수밖에 없다".(<조선의 탐식가들> 중에서)

이처럼 말이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정약용이 이런 방법으로 개를 잡긴 잡았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잡았는지 궁금해지는 동시에 슬며시 웃음까지 일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약용의 전혀 의외의 모습이거니와, 이처럼 덫을 놓고 개가 걸려들길 노심초사 바라는 갓을 쓴 한 양반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개덫' 만들던 개고기 애호가, 정약용 

책에 따르면 정약용은 개고기 애호가였다. 그렇다고 일없이, 시시때때로 개를 잡아 즐긴 것은 아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텃밭이나 부추 밭을 부지런히 가꾸어 자신의 입에 들어갈 것을 해결했음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은 '오랜 유배생활을 견뎌내기 위한 호구지책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솔직히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겠노라'는 부분을 읽으며, '이 정도면 대단한 탐식가 아냐?'의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개들이 요즘 개와 어떻게 다른지 책에선 언급하지 않았는지라 한 마리를 잡으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쉽게 짐작되지 않지만, 그래도 5일에 한 마리를 먹어치운다는 것은 지나쳐도 대단히 지나치다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랜 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는 형에게, 차마 개를 잡아먹지 못하는 형이 개라도 잡아먹고 유배지에서 살아남길 바라고 바라며, 형이 제발 그래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 요즘말로 '뻥친 것 아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다산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며 음식이 지닌 맛을 이성적으로 아예 무시했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라는게 다산의 음식철학이었다. 다산은 어떤 음식을 먹든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심지어 그는 가난을 이기려면 자신의 입과 입술을 속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다산은 입에 넣는 음식의 크기를 부풀려서 자신의 입과 눈을 속이는 방법으로 정신적 포만감을 느끼려 했다. 적은 밥을 상추로 겹겹이 싸서 큰 덩이로 만들어 먹는 것이 그 비법이었다.(<조선의 탐식가들>에서)

이와 같은 음식철학을 가진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탐식가들>은 이처럼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사대부이자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이나 역사인물들을 '어떤 음식을 좋아 했는가'의 시각으로 탐구한 책이다.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은 제4장 '가장, 사대부 양반들의 개고기 사랑'에서 다뤘는데, 가장(여름에 즐기는 개고기 요리 풍습 혹은 개고기 요리)을 즐기다 제 입에 맞지 않는다고 요리사를 때려죽인 강원 감사 유석이나, 연경에까지 가서 개장국을 지독하게 즐겨 사람들 입방아에 오른 심상규, 개고기 요리를 접대하며 벼슬을 청탁하면 누구에게든 벼슬자리를 줬던 김안로 등에 비하면 소박한 한편,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어 눈물겹다고 할까.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 시대에 '고기 먹는 날'이 있었다는 점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달걀·파·마늘·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 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만휴당기>에 그 풍속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 김술부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마늘· 냄새와 고가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공이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물러 나와, 북쪽 창문가로 나아가서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다'고 할 만 하구먼" 하였다….<연암집 권3, 공작관문고>(<조선의 탐식가들>에서)

야연(작자미상ㅣ조선시대후기ㅣ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부
 야연(작자미상ㅣ조선시대후기ㅣ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부
ⓒ 따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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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 '난회'는 '난로회'다. 책표지에서도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양반들이 난로회를 즐기는 풍경을 그린 <야연>(조선시대후기,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부다. 머리에 쓴 털모자와 털방석 등을 보아 겨울쯤으로 보이는데, 왼쪽 아래 남자는 털방석을 기생에게 양보하고 그 기생이 먹여주는 고기를 받아먹으려고 하고 있음이 재미있다.

정조는 해마다 10월에 규장각의 선비들과 일종의 고기파티라고 할 수 있는 난로회를 즐겼다. 정약용도 이 난로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런데 정조가 죽고 자신은 유배지에 있으니 무엇보다 먹는 것에 아쉬움과 미련이 많지 않았을까. 여하간 이제까지 실학자이자 정치가로만 만난 정약용을 조선의 내로라하는 탐식가들 사이에서 만날 수 있음이 반갑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식탐의 세계'

정약용처럼 이제까지 정치가나 학자로 만난 역사인물들을 먹는 것으로 만나는 것이 흥미롭기만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 자주 벌어졌던 당파 싸움도 따져놓고 보면 밥줄 때문 아닌가. 먹는 것은 또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가장 솔직한 본능 아닌가. 이런지라 어떤 인간을 알려면 무엇보다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가를 보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역사인물들의 특정 음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그야말로 '탐식' 수준이다. 어떤 위인은 자신의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누군가를 때려 죽이는가 하면, 먹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해 국법을 어기는 인물도 있다. 또한 먹을거리가 풍성한 고을 수령으로 보내달라고 뇌물을 써서 로비를 벌이는가하면, 유배당할 위기에 먹을 것 많은 곳으로 보내달라고 유배지 타령을 하는 인물도 있다. 오죽하면 저자가 '조선을 찜 쪄 먹은 희대의 탐식가들'이란 제목으로 그 정도를 소개할까.

사실 조선 시대 지배계층들의 지나치다 싶은 식탐의 세계를 읽어나가는 동안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기며 근근이 주린 배를 채웠을 일반백성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거의 만나지 못했던 '성리학의 나라 양반들의 참을 수 없는 식탐'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책이라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는 <동국세시기>나 <연암집> <다산시문집> <산림경제> 등과 같은 여타의 문헌들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이제까지 후세인들이 거의 건드린 바 없는 우리 역사 인물들의 지나치며 대단한 탐식, 그에 얽힌 가지가지 사연들을 모두 10장으로 나눠 들려준다.

주제 틈틈이 박스 형태로 관련 상식 등을 들려주는 것도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개고기 관련 장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식용 개와 애완견을 구별했을까?', '복날의 '복'은 무슨 뜻일까?', '퇴계 이황이 즐긴 술, 무술주'를 들려주는데, 참고로 무술주는 개한마리의 고기만 발라 삶은 국물과 살을 찧어 반죽한 것으로 만든 술이란다.

외에 ▲ 조선의 양반들, 왜 그리 우심적에 열광했을까? ▲ 정약용 왈, "소 염통 구워 먹는 게 부추 밭 가꿈보다 낫다" ▲ 조선을 강타한 육식 사랑, 병아리까지 ▲ 세종이 소파라치를 시행한 이유는 ▲ 조선 사람들의 유별난 소고기 사랑, 우금령은 있으나마나? 사람까지 잡다 ▲ 열구자탕에  양반들의 입이 '열강의 도가니로! ▲ 혜경궁 홍씨 생일상에 오른 개고기찜 ▲ 목은 이색에서 소설가 최서해까지, 그들의 두부사랑 500년사 ▲ 추사 김정희가 꼽은 최고의 음식은? ▲ 서거정, 순채에 홀딱 빠지다 ▲ 조선 최초의 음식 칼럼니스트 허균의 못 말리는 식탐, 그 시시콜콜 ▲ 먹다먹다 조선까지 찜 쪄 먹은 위인들은 누구누구? 등을 만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씀, 따비 펴냄, 2012년 2월, 1만5000원



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따비(2012)


태그:#탐식(음식), #난로회, #정약용, #순채, #우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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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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