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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공원 입구에는 열사가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 알려주는 묘역도가 있다. 그 근처에는 열사묘역 안내 책자도 비치되어 있다.
▲ 열사 묘역 지도 모란 공원 입구에는 열사가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 알려주는 묘역도가 있다. 그 근처에는 열사묘역 안내 책자도 비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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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황금연휴, 모란공원에서 역사 강의를 한다는 '꼬드김'에 간편한 나들이 차림으로 남양주로 차를 몰았다. 큰길에서 보면 한적한 공원 같은 그곳에는 수많은 열사가 모셔져 있다.

2010년 12월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를 위한 점거농성 등에 참여했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작년 1월 2일 사망.
▲ 우동민 열사 묘소 2010년 12월 장애인활동지원법의 올바른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를 위한 점거농성 등에 참여했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작년 1월 2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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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 제일 처음 만나는 나무 한 그루. 한 눈에 봐도 공동묘지 인데 수목장이 뜬금없다. 설명을 들어보니, 장애인 열사인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한다. 인권위를 점거하며 온몸을 다해 싸우다 죽어간 사람. 오르는 길에 만난 공원의 첫인상이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민추위 활동가로 85년 구로동맹파업 지원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을 살고 지속적인 공안의 감시추적 속에서 88년 5월 26일 아는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행방불명 됨.
▲ 안치웅 열사 추모제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민추위 활동가로 85년 구로동맹파업 지원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을 살고 지속적인 공안의 감시추적 속에서 88년 5월 26일 아는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행방불명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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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올라가니, 안치웅 열사의 추모식이 있다. 목사를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사람이 24년째 시신조차 찾지 못해 작년에 초혼장을 치뤘다. 추모제 자료집의 글귀가 가슴을 때린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외딴 섬으로, 골짜기로, 야산 저쪽 어디쯤으로 끌고 가서 때리고, 쑤시며 온갖 회유와 협박 끝에 결국은 살해하여 그 주검은 어딘가에 감추고...야만적 구금, 납치, 고문, 살인이 횡행하던 시절에 시신을 찾으면 의문사였고 찾지 못하면 행방불명이었으니 의문사는 무엇이며 행방불명은 또 무어란 말입니까"

85년 신흥정밀 입사, 86년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 모란공원에 올 당시 치열했던 장례투쟁을 상징하는 표시석이 인상적이다.
▲ 박영진 열사 묘 85년 신흥정밀 입사, 86년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 모란공원에 올 당시 치열했던 장례투쟁을 상징하는 표시석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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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구한 사연을, 역사를 가진 열사의 추모제가 거의 매주 이곳에서 진행된다.  

모란공원은 원래 공동묘지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힐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멀고 대중교통 접근성이 떨어졌고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86년 구로지역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박영진 열사는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전태일 선배가 못 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친지들은 "그럼 전태일 선배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여 이곳에 오게 된다. 자연스럽게 열사 묘역의 토대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100여 분의 열사가 이 곳 모란공원에 모셔져 있다.

위로 올라가니 박종철 열사가 보인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유명한 수사 당국의 발표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사람의 인간성을 짓밟는 행위인지,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는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하여 구속, 87년 1월 13일 대공분실에 의해 연행 후 고문폭행으로 다음날 운명.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 없는 경찰의 발표, 이 사건은 향후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 박종철 열사의 묘 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하여 구속, 87년 1월 13일 대공분실에 의해 연행 후 고문폭행으로 다음날 운명.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 없는 경찰의 발표, 이 사건은 향후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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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에 안장된 열사들의 다수는 경찰과 안기부 등 이른바 '국가폭압기구'에 의해 죽었다. "여기의 열사들을 보면 한국사회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강사의 말을 곱씹는다. 누군가는 다수가 잘살기 위해서 몇몇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열사들이 안장된 가운데 한 번이라도 서 있어 보면 그런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재단사로 일함. 69년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와 '삼동친목회' 조직, 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 전태일 열사의 묘 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재단사로 일함. 69년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와 '삼동친목회' 조직, 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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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에게 다가간다. 대학 새내기 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는 나에게 책으로, 영화로 다가와 참 많은 것을 일깨워준 고마운 선생님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을까.

가자마자 웃음 꽃이 피고 말았다. 스무 살짜리가 스스로를 '300만 근로자의 대표'로 불렀단다.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하며 세상을 불렀던 전태일. 그의 앞에 서니 강사도 대학시절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 그 시절에는 광주와 전태일 이 두 가지가 운동을 시작하는 주요한 계기였고 열사는 운동의 이정표였다고.

"처음에 전태일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어요. 이런 비참한 상황을 알리면 사람들이 봐 주겠지 했어요. 그런데 정작 회사에서의 처참한 현실을 듣고도 공무원과 회사 사장들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먼저 알고 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은 안다고 해서 분노하지 않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바보회 만들고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현실을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그의 활동의 결과는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진 자신의 해고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걸음 나가려면 결단해야 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그런 사회였어요."

전태일 열사 사후 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 결성, 40여년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시다가 2011년 9월 3일 운명.
▲ 이소선 어머니 묘 전태일 열사 사후 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 결성, 40여년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시다가 2011년 9월 3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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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사후 40여 년 동안 아들의 못다한 삶을 묵묵히 살아온 이소선 어머니의 묘소가 바로 위쪽에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건강이 나빠지셔서 타워크레인 위에 올라간 김진숙을 찾아가지 못해 못내 아쉬워 하셨다던,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온전히 살아있는 열사의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어서 싸우세요."

어머니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는 어느 순간 생각이 다르면 같이 안 싸우려고 했어요. 열사를 보세요. 볼 때 그 사람의 유서를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왜 운동을 하게 되었는가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같이 공감하고 같이 풀어나가는 운동을 하자구요."

오랜 시간을 열사운동을 해온 강사의 말이다.

94년 봉천6동 철거투쟁,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독분회 조합원, 07년 4월 1일 "한미FTA반대" 외치며 분신, 15일 투병중 운명
▲ 허세욱 열사의 묘 94년 봉천6동 철거투쟁,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독분회 조합원, 07년 4월 1일 "한미FTA반대" 외치며 분신, 15일 투병중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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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고도 가볍다. 역사의 한가운데를 날아온 기분이다. 한국현대사의 어둠과 아픔을 묻은채 공원은 그저 평화로운 듯 보인다. 우리의 가슴에 늘 간직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 목사도 선생도 노동자도 학생도, 심지어 어머니와 아들도 그곳에서 그들은 모두가 동지였다.

서로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연대하려면 누군가는 윤활류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며 '윤활유'라는 이름으로 활동. 안티 이명박 까페지기. 2012년 3월 24일 운명.
▲ 촛불전사 류한림(윤활유)의 묘 서로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연대하려면 누군가는 윤활류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며 '윤활유'라는 이름으로 활동. 안티 이명박 까페지기. 2012년 3월 24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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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석 모란공원은 일반 공동묘지이기도 하지만 열사분들이 100여 분 이상 묻혀계신 자연발생적인 민주열사추모공원이다. '열사와 역사'라는 주제의 강연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범국민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에 신청가능하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가 매년 열리며 올해에는 6.10 항쟁을 맞아 6월 10일 오후 2시 시청광장에서 진행된다.


태그:#모란공원,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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