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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정착촌은 현재 70% 공정률을 보이며 조감도 형태의 윤곽을 갖추고 있다.
 이주민 정착촌은 현재 70% 공정률을 보이며 조감도 형태의 윤곽을 갖추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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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 사람들의 삶은 고되고 팍팍하다. 이들은 품앗이로 농사짓고, 이웃 과수원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거나 계절별로 수확하는 농작물을 내다팔아 생활비를 마련해 왔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노년에는 낡은 집에 텃밭만 하나 있어도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충남도와 아산시가 이 마을에 세계 최대의 첨단산업단지를 유치했기 때문이다. 2004년, 삼성디스플레이 단지 지구지정 승인이 났다. 이후 삼성전자 LCD, 삼성코닝정밀소재,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를 비롯한 계열사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460만㎡(140만평)에 이르는 '삼성디스플레이시티'가 형성됐다. 또 근로자들이 생활할 거대한 아파트 단지 수천 가구가 들어서고 있다.

삼성은 지구지정 승인을 받은 시점부터 바로 보상에 착수했다. 주민마다 개인 차이는 좀 있지만 보상은 2006년까지 대부분 완료됐다. 몇몇 주민은 끝까지 보상절차에 협의하지 않고 버티다 명도소송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결과,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던 포도밭이 하루아침에 거대한 공장으로 바뀌고, 경운기 한 대가 겨우 지나던 농로는 왕복 6차선 산업도로로 바뀌었다. 마을공동체 붕괴와 함께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투기 자본도 시골마을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자본가들의 유혹에 땅을 넘긴 주민들은 일찌감치 마을을 떠났다. 몇몇 농민들은 넉넉한 보상금으로 팔자를 고쳤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들과 근근이 살아가던 임차농민, 그리고 수많은 영세농민들은 대대로 지켜왔던 삶터와 공동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땅을 치고 통곡해야 했다.

66가구, 절망 딛고 정착촌을 지켜내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 이주민 정착촌 '블루클리스탈 빌리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 이주민 정착촌 '블루클리스탈 빌리지'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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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이 이뤄지는 전국 어느 곳을 가봐도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10%를 넘기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는 원주민들에게 주어지는 이주단지나 분양 우선권이 대부분 자본가의 손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상당수 원주민들은 토지나 주택을 수용당하며, 보상받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토지나 주택의 보상가는 개발 이전보다 높게 책정된다 하더라도 인근 지역의 부동산 시세는 그보다 훨씬 더 오르기 때문이다. 결국 원주민들은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사 개발에 따른 이주자 택지를 제공 받더라도 원주민들은 건축물을 지을 여력이 없어 자본가들에게 어느 정도 웃돈을 받고 내주기 일쑤다.

명암리 주민들도 몇 푼의 보상금에 삶터를 내줘야 했고, 이웃과 헤어져 떠돌이 신세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명암리 66가구(주민 중 40명은 70대)는 무너지는 마을공동체를 바라보며 2005년, 새로운 꿈을 설계했다. 누구도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되도록, 새로운 마을을 공동으로 건축한다는 공동목표를 세웠다.

이주민 마을 공동체의 꿈 70%에서 방황

힘을 모아 공동목표를 세우고 꿈을 설계했지만 문제는 마을을 만들 돈이 절대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주민 66가구 중 1억 원 미만의 보상금을 받은 주민이 40%로 절반에 가깝다. 이들은 건축비를 비롯한 모든 비용을 대출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들은 이주자택지, 보상금 등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사업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자 5억 원 이상의 보상을 받은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건축비를 먼저 내며, 보상금을 적게 받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주민들은 지난해 5월 건축 허가를 얻은 뒤 9월 22일 기공식과 함께 정착촌 만들기의 첫 삽을 떴다. 5월 현재 정착촌 만들기는 7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탕정산업단지 이주자조합 김환일 총무이사는 "자본과 정치권력, 산업화가 마을공동체를 붕괴시켰지만 이웃과 함께 살겠다는 주민들의 열의만큼은 꺾지 못했다"며 "그동안 수없는 난관과 싸우며 지켜낸 새 보금자리가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철기 시의원은 "2005년 삼성에 땅을 내준 이후 지난 8년간 고통을 감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해준 주민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우리 상황은)앞으로 어떤 형태의 개발이든 사업에 앞서 원주민들의 주거와 생계대책을 먼저 해결하고 난 다음에 진행해야 한다는 선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민들의 꿈이 담긴 정착촌, 그러나...

주민들은 현재 2층을 원룸이 아닌 상가로 허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현재 2층을 원룸이 아닌 상가로 허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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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원주민들 스스로 도시계획을 수립해 자신들의 마을을 완성시킨 사례가 없다. 그러나 평균연령 65세인 명암마을 주민들은 오로지 함께 살겠다는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조합을 결성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품 마을을 함께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정착촌의 마을이름은 '블루크리스탈 빌리지'다. 정착촌은 주민 개개인이 짓는 건축물이 아니다. 마을 전체를 설계하고, 집 한 채 한 채를 마을 전체 풍경과 어울리도록 개성을 살려 짓고 있다.

주민들은 정착촌이 완성되면 충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 동화 같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류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뮤직비디오가 만들어져 세계로 수출된다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될 것이라며 기대가 크다.

그러나, 개발지역 원주민들의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상생할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명암마을 이주민 정착촌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와 LH에서 10여 년간 추진하던 수백만 ㎡에 이르는 도시개발계획을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백지화 시켰기 때문이다.

당초 정착촌을 설계할 당시엔 1층 상가, 2층 원룸, 3층 주택으로 계획했다. 그 이유는 아산신도시 탕정지구 2단계가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원룸수요가 꽤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3월 31일 국토해양부와 LH는 탕정지구 2단계 사업의 71%에 해당하는 1247만3000㎡의 도시개발 사업에 대해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명암리 주민들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원룸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에 근린비율의 확충이 절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충남도는 타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사업변경을 허가해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현재 건축물 완성단계애 도달했지만, 2층에 대한 작업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2층 원룸을 상가로 전환시켜 달라는 요구는 원주민만의 요구가 아니다. 삼성근로자는 물론 탕정산업단지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협력업체와 그 가족들 5만 명의 요구이기도 하다.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원룸이 아니라 병원, 학원, 이·미용실, 식당 등 편의시설이다. 이곳 주민들은 이러한 편의시설을 이용하려면 인근도시인 천안으로 가야만 한다.

"아산신도시가 계획대로 됐다면, 혼란 없었을 것"

명암리 정착촌 주민들은 "법과 행정이 지난 10년간 자신들을 괴롭혀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암리 정착촌 주민들은 "법과 행정이 지난 10년간 자신들을 괴롭혀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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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이주자 택지 원주민을 비롯한 도시계획전문가, 이광열 충남도의원, 조철기 아산시의원 등 10여명이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구만수 공유가치를생각하는도시계획가들의모임(공생계) 도시계획기술사는 "땅은 물론 집과 생활터전을 모두 빼앗긴 원주민들은 삼성기업도시와 아산신도시의 가장 큰 피해자"라며 "인·허가권을 가진 충남도는 어렵게 정착하려는 주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부도덕한 범법자로 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특별계획구역지정을 비롯해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며 "결국 법적인 문제가 아니고 결정권자 의지의 문제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 기술사는 "아산시와 충남도가 적극 나서서 해결해줘야 할 민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행정기관의 방해로 원주민들은 눈물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며 "주민들의 요구가 부담스럽다면 관련 심의위원회에 본 사안을 상정해 전문적인 심의를 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삼성디스플레이, 코닝, 모바일 등에 종사하는 직원과 가족 등 배후인구는 5만명이 족히 넘지만 인근에 마땅한 병원도 식당도, 학원도,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다"며 "아산신도시에서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모든 계획이 백지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 역할을 이주민 정착촌에서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며 "삼성 근로자와 트라팰리스 아파트 입주민들은 충남도에 보낼 탄원서와 입주민 서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철기 아산시의회 의원은 "지금 원주민 정착촌은 원룸이 아닌 상가시설이 필요하다"며 "이러한 상황은 주민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정부와 LH가 아산신도시 2단계사업을 포기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아산신도시가 계획대로 추진됐다면 이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광열 충남도의회 의원도 "충남도 관련부서를 찾아가 주민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이유를 확인하겠다"며 "안희정 도지사가 직접 주민들의 요구사안을 들을 수 있도록 간담회 자리를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김환일 이주민조합 탕정산업 이사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10년간 삼성과 아산시와 충남도와 정부와 LH와 싸워야 했다"며 "지금 우리는 너무 힘들고 지쳐있다, 법과 행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충남도 관계자는 "삼성과 이주자택지 원주민들로부터 용도변경 신청서가 들어왔지만 불허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택지개발업무 처리지침에 따르면 이주자 택지는 근린생활시설 한도를 40%로 제한하고 있다"며 "도시는 처음부터 계획했던 용도대로 큰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행정의 일관성과 형평성 문제다, 만일 이 원칙이 무너지면 그동안 진행 됐던 이주자 택지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시사>와 <교차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아산시, #탕정산업, #삼성, #블루크리스탈빌리지, #명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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