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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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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인 고 김훈 중위(육사 52기, 사망당시 25세) 사망사건이 최근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3월 실시된 총기실험 결과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기존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또 군 고위관계자가 "김훈 중위 유족이 순직처리를 요청한다면 국방부는 이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것으로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확인됐다.

국방부가 사건 발생 14년만에 사망 당시 현장과 동일한 조건을 상정하고 실시한 실험에서 김 중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나옴에 따라 과거 국방부의 부실 수사 논란은 물론 내년 2월 살인죄 공소시효(15년) 만료를 앞두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을 전망이다.

14년만에 실시된 총기 발사 실험
  
지난 3월 22일 오전 경기도 김포 소재 모 부대에서는 김훈 중위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한 총기 실험이 있었다.

김 중위 사망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와 동일한 M9 베레타를 이용해 10명의 사수가 각각 1발씩 권총사격을 한 후, 4시간 뒤에 방아쇠를 당긴 오른손에서 뇌관화약을 검출하는 실험을 한 것.

이날 사격 실험은 김 중위의 시신이 발견된 비무장지대 241 GP(Guard Post, 감시 초소)내 벙커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세트안에서 실시됐고, 사망 당일 미군 수사 요원이 김 중위의 시신에서 뇌관화약을 채취한 시간과 동일한 사격후 4시간 뒤에 사수들의 손을 면봉으로 닦아낸 후 이의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아래 국과수)에 의뢰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이날 실험은 권총 사망사건에서 자타살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을 위해 마련되었다.

M9 베레타 권총을 발사할 때 탄피 배출구로 탄피가 튀어나오면서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 손등 부위에 뇌관화약 성분이 묻게된다.
▲ M9 베레타 M9 베레타 권총을 발사할 때 탄피 배출구로 탄피가 튀어나오면서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 손등 부위에 뇌관화약 성분이 묻게된다.
ⓒ world.guns.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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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발사할 때 총구로는 탄환과 함께 미처 타지 못한 무연화약 입자 및 기타 연소 잔유물이 분출되고, 탄피 배출구로는 뇌관화약이 연소되고 남은 성분인 바륨과 안티몬, 납 등의 금속성분이 배출된다. 이때 뇌관화약은 무연화약보다 양이 훨씬 적어 총기의 탄피 배출구, 즉 방아쇠를 격발한 손 주변에만 남게 된다.

이 때문에 권총 사망사건의 경우 실제 발사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권총을 발사한 사람의 손에 묻은 뇌관화약 성분인 바륨과 안티몬 등을 채취하여 분석하는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시험은 사건 당시 김 중위의 유류품을 감식한 미 육군 범죄수사연구소 뿐 아니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국방부 조사본부 등 전세계적으로 범죄 감식기관이 권총 발사자를 식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김 중위 시신에서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 바닥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되었다. 오른손잡이인 김 중위가 실제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면 그의 오른쪽 손등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미 육군 범죄수사연구소는 그의 왼손바닥에서만 뇌관화약이 발견된 점에 특별히 유의해 '자살로 단정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던 것이다.

김 중위의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서 발견된 뇌관화약의 존재에 대해 재미 법의학자인 노여수 박사는 '자신에게 겨눠진 총을 막는 과정에서 생긴 방어 흔적(디펜스 제스춰)'라고 분석했다. 일반적인 권총 자살 사건과 배치되는 증거는 오히려 타살의 강력한 증거라는 견해다.

뉴욕 주정부 소속 법의학자로 30여 년동안 권총을 이용한 자살 및 타살자 시신 1천여구를 부검해 사인을 가린 노 박사는 김 중위 시신 부검내용, 사건현장을 촬영한 비디오 및 사건관련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김 중위는 자살로 위장된, 전문가에 의한 권총 타살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소견을 밝혔다.

국방부, 타살 정황을 자살 증거로 꿰맞춰

하지만 국방부는 군총 발사자의 38%에서만 뇌관화약이 검출된다는 미국 논문을 근거로 이를 애써 무시해왔다.

국방부가 김 중위 자살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논문은 미 육군 과학수사연구소에서 10년동안 112명의 권총 자살자를 조사한 통계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권총의 종류, 발사 장소와 위치, 기상상태 등을 구분하지 않은 일반적 자료에 불과해 김훈 중위 자살의 근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그동안 끊임 없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 국방부가 김 중위 사망 이듬해인 1999년 1월 실제 베레타 권총을 이용한 총기실험을 실시했으며, 당시 실험에 참가했던 3명의 사수 모두 예외 없이 방아쇠를 당긴 오른손 손등에서 뇌관화약이 검출된 사실이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일반적인 논문 통계를 앞세운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1999년 2월 6일 작성된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에는 1999년 1월 25일 특수전학교 실내사격장에서 실시된 '뇌관화약 잔사 확인 시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3명의 실험 참가자 모두 방아쇠를 당긴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되었고(양성), 전투복 좌우측 팔부위에서 무연화약 반응이 나타났다.
▲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 1999년 2월 6일 작성된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에는 1999년 1월 25일 특수전학교 실내사격장에서 실시된 '뇌관화약 잔사 확인 시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3명의 실험 참가자 모두 방아쇠를 당긴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되었고(양성), 전투복 좌우측 팔부위에서 무연화약 반응이 나타났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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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던 서종표 민주통합당 의원에게 국방부는 자신들의 총기시험이 잘못될 수 있다며 논문통계가 더 신뢰성이 크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실시된 시험은 김훈 중위를 순직자로 처리해달라는 유족들의 청원을 받은 국민권익위원회 측이 국방부에 강력히 요구해 이루어졌다. 국방부 조사본부 내에서 '14년전 선배들이 잘못 수사한 사건 때문에 왜 우리들까지 비난을 받아야 하느냐'는 일선 수사관들의 불만도 시험이 성사되는데 한 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험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권총 사수의 수도 10명으로 늘려 실시됐다.

지난 3월 22일 국방부 조사본부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경우 오른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남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힌 한 법의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5명의 사수가 사진과 같은 자세로 사격을 실시했지만 이들 사수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오른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됐다. 사진은 기자가 실험 내용을 토대로 재현한 장면
▲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지난 3월 22일 국방부 조사본부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경우 오른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남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힌 한 법의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5명의 사수가 사진과 같은 자세로 사격을 실시했지만 이들 사수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오른손에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됐다. 사진은 기자가 실험 내용을 토대로 재현한 장면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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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시험에서 국방부는 과거 '김 중위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아닌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 자살설에 힘을 실어줬던 한 법의학자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서 10명 중 5명의 사수는 일반적인 사격자세와는 다른 엄지 손가락 사격을 실시한 후 손에 남은 발사 잔유물을 채취,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최근 나온 국과수 시험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 사격 자세인 검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던 5명의 사수는 물론 부자연스럽게 엄지 손가락으로 사격한 5명의 오른손에서 모두 예외없이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됐다.

오른손으로 M9 베레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사수 10명 모두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성분이 발견된 것이다. 시험 결과는 김훈 중위의 사인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군 고위관계자 "김훈 중위 순직처리 반대 않겠다"

곧 국과수는 이러한 결과를 담은 감정서를 곧 국민권익위원회측에 전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군 고위관계자는 최근 유족측의 입장을 대리하고 있는 한 예비역 장성에게 "김훈 중위 유족이 순직처리를 요구한다면 국방부는 이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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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68. 육사 21기) 예비역 육군 중장은 지난 11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 14년 동안이나 조작으로 일관해왔던 국방부의 주장이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국립묘지 안장 등 즉각적인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그동안 유족측을 끊임없이 기만해왔던 수사책임자와 국방부는 분명하게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에 대해 지난 1999년 국회 국방위원회에 설치되었던 '김훈 중위 사건 진상규명소위원회'는 그해 5월 31일 부실 수사에 대한 의문 15가지를 제기하며 '김훈 중위는 타살당했다'는 요지의 활동 보고서를 펴냈다.

대법원도 2006년 12월 김훈 중위 사건 관련 판결을 통해 "초동수사가 잘못돼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라고 판시했다. 3년간 사건을 조사했던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군 의문사위)는 2009년 11월 2일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자살 입장을 줄기차게 고수했던 국방부와는 달리 국회와 법원, 군의문사위가 '적어도 자살은 아니다'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김 중위의 유골은 14년째 경기도 벽제의 육군 제 1군단 헌병대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


태그:#김훈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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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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