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내외가 유해를 모시고 관리사들이 수목장을 준비하고 있는 추모목으로 가다
▲ 조상의 유해 상자를 들고 추모목으로 가다. 필자내외가 유해를 모시고 관리사들이 수목장을 준비하고 있는 추모목으로 가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올해 4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3년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윤달이다. 음력 윤달은 하늘과 땅의 신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달로, 예로부터 이장을 하거나 수의(壽衣)를 하는 풍습이 있다.

나는 집안의 8대 종손 및 장손으로 어려서부터 엄한 유교의 가풍 아래서 자랐다. 4대 봉제사는 물론, 장례는 으레 선산에 매장해야 하는 걸로 알고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네 분을 내 손으로 모두 모셨다.

지난 1999년 여름. 나는 항일유적답사 목적으로 베이징에 가 경북 안동 출신의 이명준이라는 독립운동가를 만나 그분의 인생역정을 들었다. 93세의 노옹이셨던 이명준 선생은 심신이 매우 건강하신 분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신의 기나 긴 독립운동의 가시밭 인생 역정을 들었는데, 이명준 선생은 마무리 말씀으로 장례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의 매장 풍습을 바꿔야 한다. 오늘날 매장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나 김일성 주석도 죽은 후에 화장하지 않고 안전관에 모셔 두고 있는데, 인민을 교육하기 위해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100년이나 1000년이 지난 다음에는 분명히 잘못된 일로 판명될 것이다.

한 줌의 재가 된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은 얼마나 멋진 선각자였던가. 호화 분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말로 후손을 위한다면 화장하는 게 옳다. 나는 이미 부모와 처를 모두 화장했고, 나도 화장하라고 일렀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장례

이명준 선생의 말씀은 당시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의 생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두 지도자의 거룩한 삶과 장엄한 유언, 그리고 인생의 마무리에 대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죽음에 앞서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 "유골을 안치하는 영당(靈堂)을 만들지 말라" "각막을 기증하고, 유해는 의학연구를 위한 해부용으로 써 달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덩샤오핑의 시신은 그 유언대로 화장해 남은 뼛가루는 꽃잎과 함께 서해 바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76년 1월 8일, 유엔본부에 조기가 게양됐다. 이날은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날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의 반대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발트 하임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없었다. 그리고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앞으로 어느 나라 원수든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에만 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우리 유엔에서 그를 위한 조기를 게양할 것이다."

서구의 장묘 문화... 그들에게 배우라

LA 한 장묘 공원에서 한 가족이 조촐한 장례식을 하고 있다(2004년 촬영).
▲ 미국인들의 장례 모습 LA 한 장묘 공원에서 한 가족이 조촐한 장례식을 하고 있다(2004년 촬영).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그런 글과 보도문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 나는 네 차례에 걸쳐 드넓은 중국 대륙을 누비면서 눈을 부릅뜨고 묘지를 살펴봤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지방에는 일부 집단 묘지가 있었으나, 다른 대부분 지역에서는 무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화장돼 바다에 날려졌는데, 그 누가 호화분묘를 만들겠는가.

이후 나는 세계 곳곳에서 역사기행을 하면서 묘지를 눈여겨봤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러시아, 미국, 중국, 그 밖에 여러 나라에서도 대한민국과 같은 요란한 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 평 남짓한 평장 묘지에 새겨진 간단한 비문(2004년 촬영).
▲ 미국인들의 묘비 한 평 남짓한 평장 묘지에 새겨진 간단한 비문(2004년 촬영).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2004년 한 지인의 안내로 미국 LA에 있는 'Forest Lawn Mortuary'라는 한 장묘공원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한 미국인 장례식 장면을 지켜봤는데, 집전하는 목사님과 검은 상복을 입은 10여 명의 유족이 엄숙하지만,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그 장묘공원의 묘지들은 대부분 1평 남짓한 평장으로 묘비에는 고인의 이름과 출생과 사망연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 딸, 아들'이라는 말밖에 없었다.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들의 무덤도 이와 비슷하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죽음 앞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웃 일본에서 도심이나 외곽 곳곳에 납골공원묘원을 볼 수 있었지만, 국토 아무 곳에 묘지를 쓰지는 않았다. 지구 상 유독 한국만이 양지바르고 야트막한 곳을 묘지로 사용하고 있다. 내 산, 내 땅이라도 공공의 이익에 알맞게 이용되는 것이 바로 사회정의 아닐까.

세상은 여관이다, 잠시 머무는 곳이다

포크레인 파묘에 앞서 상주가 괭이로 개장하다
▲ 어머니 묘를 개장하다 포크레인 파묘에 앞서 상주가 괭이로 개장하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일부 정치지도자나 소위 '졸부'들이 호화 관혼상제를 계속하고 있어 국민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고자 미리 선거 전에 산소를 이장하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된 자는 먼저 조상의 산소에 봉분을 높이고, 석물을 들이는가 하면, 심지어는 헬기장까지 만드는 짓을 해 뜻있는 국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것을 본 일부 개념 없는 국민들은 그것이 효의 귀감인 양, 벼락출세를 하거나 '졸부'가 되면 먼저 조상 묘 단장에 열을 올렸다. 열차나 승용차로 여행을 하면서 차창을 내다보면 양지바른 산지에는 으레 묘지가 있고, 그 묘지에는 석물이 장식돼 있는 경우를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 일부 공원묘지는 온 산이 무덤으로 장마철이면 수분을 흡수치 못해 산사태가 발생해 무덤들이 허물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조상의 시신들이 뒤섞이고, 장마가 끝나면 자기 조상 시신을 찾는다고 법석을 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꼴을 보고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공원묘역을 찾고 있다. 해마다 추석을 앞둔 즈음에는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가 막히고, 벌초하다 예초기에 다치고 심지어 벌에 쏘이는 사람도 생긴다. 오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뉴스도 연례행사처럼 심심치 않게 들린다.

사실 자기 부모는 다 소중하다. 그 분을 위해 묘지로 쓰이는 땅은 아깝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대한민국 사람이, 특히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사람들이 솔선해서 자연과 국토보전에 대한 의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 국토는 묘지로 뒤덮일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지구의 임자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사실 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잠시 빌려 쓸 뿐이다. 일찍이 이백은 "천지자(天地者)는 만물지역려(萬物之逆旅)"라고 했다. 곧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라는 말로, 이 세상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지의 주인, 곧 여관의 주인은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나는 여관 주인 노릇을 해보진 않았지만, 조용히 이 세상에 왔다가 사용료를 치른 후 슬며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제시간에 떠나는 손님을 좋아할 것이다. 천지의 주인은 그런 깨끔한 사람을 당신 곁에 두려고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산야는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다. 그곳에 죽은 자를 위해 지나치게 무덤을 만들고, 큰 돌덩이를 갖다놓고 자연을 파괴하는 하는 일을 일삼는 사람은 천지의 주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티베트 장례 풍습의 참 의미

해방 전 아버지가 도개소학교 교사시절 살았던 도개면 신곡동의 신혼집.
▲ 아버지 어머니가 살았던 신혼집 해방 전 아버지가 도개소학교 교사시절 살았던 도개면 신곡동의 신혼집.
ⓒ 박도

관련사진보기


언젠가 신문에서 티베트 사람들은 죽으면 자신의 육신을 독수리나 까마귀에게 보시하는 조장(鳥葬), 또는 천장(天葬)을 한다는 보도를 보고 야만스러운 장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 나름의 깊은 윤회의식과 살아생전의 죄에 대한 갚음을 행하는 티베트인들의 자연에 대한 높은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괴롭히며 잡아먹는가. 마지막 가는 길에 되갚음으로 그들의 먹이가 되는 게 바른 죄 닦음이 아닐까.

나는 일찍부터 선산에 있는 조상의 묘를 수목장으로 천장(遷葬)하고 싶었지만 실천에 옮기기 힘들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아내는 이미 사후 시신 기증을 했다. 딸 아들도 그런 터라 우리 가족 내에서는 천장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집안에서 굳이 선산에 쓴 묘지까지 천장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이견을 설득하고, 또 "산소 이장은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다"라는 속설로 때를 기다렸다.

그런 가운데 이태 전, 오대산 월정사의 수목장을 보고, 내가 바랐던 이상과 같아 그때부터 마음속에 점지해 뒀다. 그리고 올해 윤삼월을 기다려 마침내 지난 5월 4일, 이장을 단행했다.

추모목에 유일한 인공 장식물인 망자 명패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존함 메달을 달았다.
▲ 추모목에 걸린 네 분 조상의 명패 추모목에 유일한 인공 장식물인 망자 명패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존함 메달을 달았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아내가 "올 윤삼월은 이장하는 집이 많아 화장장 접수조차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말을 전하기에 나는 지난 4월 중순부터 부쩍 이장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선산이 있는 경북 구미시 도개면을 찾아가 개장 신고를 한 뒤 장의사를 통해 화장장에 접수했다. 지난 5월 3일 나와 아내, 아들 셋이 선산의 조상 묘에 고유 제사를 올린 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개장했다.

무덤에서 수습한 유골을 화장해 분골한 뒤 한지에 싸 상자에 담아 집에 돌아왔다. 하룻밤 집안에 모신 뒤 다음 날(5월 4일) 가까운 유족들을 모시고 월정사 지장암 옆 숲에서 스님의 집전으로 수목장례를 드렸다. 이어 대법당에서 반혼제를 올렸다.

아들에게 유언하다... "나를 뿌려다오"

추모목 뿌리에 흩은 유해에 흙을 덮고 유족이 발로 다지고 있다.
▲ 흙다짐 추모목 뿌리에 흩은 유해에 흙을 덮고 유족이 발로 다지고 있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이날 참석한 유족들은 "날씨도 좋고 언저리 경치도 아름답고, 수목장 이장 절차를 지켜보니까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가장 좋은 장례인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날 헤어지기 전 찻집에서 차를 나누며 나는 아우들과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곳을 어떤 의무감 때문에 찾지는 말고, 지나는 길이나 마음이 울적할 때, 혹은 삼림욕을 하고 싶을 때 찾으렴. 그리고, 음식물이나 일체 장식물의 반입은 안 되니까 그냥 묵념만 드리고 가면 된다."

유족들이 이장 인사를 하고 있다.
▲ 자손들의 이장 인사 유족들이 이장 인사를 하고 있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그날 참석한 친지들과 헤어진 뒤 돌아오면서 핸들은 잡은 아들에게 나는 유언을 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월정사 원주실에 부탁해 내 유해를 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추모목 뿌리에 뿌려라. 만일 원주실에서 그 추모목에 정원 초과로 안 된다고 하면 가까운 곳에 새 나무 뿌리에 유해를 묻어주렴. 그리고 너희 어머니가 죽으면(아내는 이미 사후 시신 기증을 했기에)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 아버지 유해 뿌린 곳에다가 묻어다오."

아들은 알겠다고 답했다. 내 유언은 이어졌다.

"수의는 특별히 마련하지 말고, 아버지가 평소 입었던 옷을 입혀다오. 그때 네 형편이 어떨지 모르겠다만 가능한 부의금은 받지 말고."

아들은 다시 그러겠다고 답했다. 아들의 대답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와 함께 내가 갈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한 뿌듯함도 생겼다. 아울러 남은 날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월정사 대법당 적광전에서 반혼제를 올리다.
▲ 적광전 월정사 대법당 적광전에서 반혼제를 올리다.
ⓒ 박상현

관련사진보기



태그:#수목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