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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에는 짧게 소개되고 말았지만, 지난 4월 22일 이스라엘에서는 정부 내각이 재벌해체(break-up of conglomerates)를 의미하는 결정을 내리고 의회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중동의 전쟁과 종교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재벌 문제가 튀어나오니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경제민주화 담론이 주목을 받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경제민주화의 전제는 '재벌개혁'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스라엘에 대한 간단한 경제 정보부터 확인해보자. 이스라엘 인구는 760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6분의 1 정도이다. GDP 규모는 달러 환산기준으로 2011년에 2420억 달러. 우리나라의 1조1164억 달러에 비하면 5분의 1 정도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1000달러다. 이 정도면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이른 강소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군사 강국이다.

통신과 에너지 재벌이 장악한 이스라엘 경제

이스라엘도 한국과 유사하게 군사 대국화와 급속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재벌체제를 만들고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던 드로르 스트롬(Dror Strum)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2011년 8월 17일)에서 이스라엘 경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경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산업의 영역을 벗어나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들에 의해 시장이 장악돼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시장이다. 이스라엘의 5대 은행 모두 재벌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예루살렘 헤브루 대학 경제학부 야페(Yishay Yafeh) 교수는 "재벌들은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는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등 지나친 다각화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관계자의 말을 요약하면 이스라엘 재벌체제는 한마디로 금산분리도 안 돼 있고,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한국재벌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어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스라엘 시민의 생활 속에서 재벌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최근 교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 이스라엘의 일반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집과 이웃집들 모두 같은 대기업에서 지은 것이고, 보험이나 휴대폰과 인터넷 서비스도 다 같은 회사가 제공한다. 냉장고에는 역시 같은 회사가 운영하는 수퍼마켓에서 사온 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옷장에 들어있는 옷들이나 구도도 같은 회사에 속하는 상점들에서 구입한 것이다. (중략) 이 집에서 보는 신문도, 재테크를 위해 이용하는 금융업체도 다 같은 재벌의 계열사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최대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신생 바이오텍 기업에서 일한다. 그런데 이 회사들도 같은 재벌 소유다."

어떤가. 한국의 삼성을 그대로 대입해도 될 만큼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삼성'은 어떤 기업일까. 이스라엘 최대 재벌은 통신 재벌인 IDB그룹과 에너지 재벌인 델렉(Delek)그룹이다. IDB그룹의 경우 이동 통신사, 건설, 수퍼마켓, 시멘트, 종이, 화학, 소매업, 보험, 의료, 여행, 신문 등 다양한 업종에서 선두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IDB그룹은 자산이 300억 달러고, 직원이 4만 명에 이른다. 물론 2000억 달러(원화로 255조 원) 이상의 자산과 21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한국의 삼성그룹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왜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경우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전체 상장기업의 40%를 넘는다.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경제력 집중도를 보이고 있다.
▲ 주요 국가별 10대 대기업의 주가 총액 비중 이스라엘의 경우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전체 상장기업의 40%를 넘는다.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경제력 집중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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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를 보면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40%를 넘는 것으로 돼 있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상황이고 한국과 유사한 정도다(위 막대그래프 참고). 그리고 2010년 기준으로 상위 6대 재벌그룹의 매출액은 이스라엘 전체 GDP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 5대 재벌의 GDP대비 매출액 비중은 55.7%이고 삼성 재벌 단 한 개 그룹의 매출액 비중이 20%를 넘어 한국 재벌이 이스라엘 재벌을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동의 군사적 초강국이자 경제적으로는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강소국 이스라엘에도 한국과 유사한 재벌체제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스라엘 국민 경제와 국민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내각 10여 개 조항의 재벌개혁안 발표

이와 같은 이스라엘 재벌체제에 대해 이스라엘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의 내각이 결정한 재벌개혁은 어떤 내용일까. 한국 코트라(KOTRA)가 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10여 가지 재벌 개혁안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금산분리 조항과 지주회사 출자 규제 조항이다(아래 표 참고).

지난 4월 22일 이스라엘 내각이 발표한 재벌개혁의 주요 내용이다. 금산분리와 지주회사 출자 규제를 포함한 11개의 조항이 발표되었다.
▲ 이스라엘의 주요 재벌개혁 내용 지난 4월 22일 이스라엘 내각이 발표한 재벌개혁의 주요 내용이다. 금산분리와 지주회사 출자 규제를 포함한 11개의 조항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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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1990년대 세계적으로 밀어닥친 민영화 바람 속에서 국영은행을 민영화하고 이를 재벌들에게 넘겼다. 그 결과 재벌들이 은행까지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혁안에서는 기업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갈 경우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와 일반 기업을 동시에 소유하지 못하도록 금산분리를 시행했다. 때문에 많은 재벌들이 그룹을 쪼개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일단 주요 재벌들은 금융회사를 포기할 것으로 보인다. IDB홀딩스는 최대 무선통신회사인 셀콤(Cellcom)을 계속 보유하는 대신 계열사인 크랄 보험(Clal Insurance)을 처분할 것으로 예상되며, 델렉(Delek)그룹은 석유화학 기업을 보유하는 대신 역시 계열 보험회사인 피닉스(The Phoenix)를 매각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스라엘과 달리 우리나라는 산업자본이 은행지분을 9% 이상 소유할 수 없게 돼 있다. 원래는 4% 제한이었던 것을 이명박 정부가 완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완벽하게 금산분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현재 수준은 금산분리(금융과 산업 분리)가 아니라 은산분리(은행과 산업의 분리)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이 은행만 소유하지 못할 뿐이지 증권이나 보험사 등 제2금융회사는 소유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삼성 그룹이 대표적이다.

재벌개혁의 핵심 중 하나, 금산분리

참여정부 시절 금융감독원(당시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과 국책 금융연구원 원장을 지냈던 이동걸 교수는 지난 2009년 선진국 중에 우리나라처럼 산업자본이 증권이나 보험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미 실질적으로 재벌의 지배하에 있는 제2금융권도 궁극적으로는 산업재벌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재벌금융 문제가 야기되는 부분이 제2금융권이다. 이미 재벌이 소유. 지배하고 있는 증권 및 보험사를 일시에 분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부작용이 크고 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증권. 보험 등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소유제한을 단계적으로 강화하거나 대주주의 적격성 강화 등의 방법을 통해 제 2금융권에 금산 분리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성그룹은 80개 가까운 기업들이 복잡한 출자 관계로 얽혀 있지만, 크게 보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출자 관계의 골격이 형성돼 있다. 최상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지배하는 에버랜드가 존재해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한다. 이렇게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에버랜드의 순환출자구조가 형성된다.

다만 지난해 말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지분 25% 가운데 17%를 매각하면서 순환출자는 정리 수순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강건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삼성생명에서 삼성전자로의 출자관계, 그리고 삼성전자에서 삼성카드로의 출자관계다. 강한 금산결합이 유지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험이 보여주듯 우리의 경우에도 금산분리는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이다.

또 다른 주요 개혁안인 '지주회사 출자 규제 조항'은 과도한 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는 재벌계열사 간의 출자 사슬을 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재벌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이는 순환출자 형식보다는 지주회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번 개혁안에서는 기존 기업의 경우 지주회사 - 자회사 - 손자회사 - 증손회사까지만 출자를 허용해주고 증손회사가 다시 계열사를 소유하는 것은 불허된다. 또한 신규 기업들은 지주회사 - 자회사 - 손자회사까지만 허용되며 그 이하의 확장은 금지된다.

이외에도 외부인 참여 이사회 요건 강화, 소수 주주권 강화, 공적 연기금 투자시 주주권 강화, 공적 자산 매각시 재벌 참여 제한 등 다양한 재벌 규제안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국내 재벌개혁에서 요구되는 부분과도 상당 부분 공통되는 지점들이다.

시민들의 거리 시위가 재벌개혁의 시발점

뉴욕 맨해튼에서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지난해 11월 17일(현지시각)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청 홀 인근 폴리스퀘어에서 시위를 벌인 뒤, "우리의 사상(운동)은 쫓아낼 수 없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지난해 11월 17일(현지시각)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청 홀 인근 폴리스퀘어에서 시위를 벌인 뒤, "우리의 사상(운동)은 쫓아낼 수 없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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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이 있다. 이토록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을 향해 어떻게 이런 강력한 규제를 단행할 수 있었을까. 분명 이스라엘 재벌의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와중에 재벌을 개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스라엘 재벌개혁안의 윤곽이 나온 것은 2011년 9월이었다. 그 한 달 전 8월 이스라엘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가 바로 재벌개혁의 동력이 됐다.

2011년 <타임스(Times)>가 올해의 인물로'시위자(Protesters)'를 선정했을 만큼 지난해에는 전 세계적으로 시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 공통적인 원인은 세계 경제위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나라에서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고가 있었고 이것이 시위로 이어졌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6월 높은 주택 임대료 때문에 살기 어렵다는 내용이 페이스북을 통해 퍼졌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 아비브(Tel Aviv) 중심가에서 텐트를 세우고 숙식을 하면서 시위를 시작했다. SNS와 텐트시위라는 2011년 세계적 시위의 전형이 이스라엘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아랍과의 전쟁분위기 때문에 좀처럼 정부에 저항운동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에서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시위는 서민뿐만 아니라 중산층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지난해 8월 6일에는 텔 아비브에서의 25만 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3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760만 인구 중 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니 우리나라로 환산한다면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는 소리다.

특히 이스라엘 시민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불평등이었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이스라엘은 불평등이 심한 국가 5위다. 2008년 기준  이스라엘의 지니계수는 3.9였다. 유럽 연합이 3.0 전후이고 우리나라도 3.1 내외였다.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치고는 불평등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초 3.5에서 빠르게 악화된 결과다. 그 결과 2008년 이스라엘의 빈곤선 이하 가구는 무려 24%나 됐다. 상당히 많은 가구가 소득으로 식료품과 주거, 교육과 건강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 바로 2011년 8월의 이스라엘 시위였다.

불평등과 물가상승의 원인으로 독점재벌 지목

그리고 이스라엘 시민들은 심각한 불평등과 물가상승에 의한 생활고의 원인이 독점적 재벌(monopolistic conglomerates)에 있다고 판단했다. 독점재벌이 경제를 통제해 독점가격을 매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국민들이 석유가격의 문제는 정유 독점재벌의 독점가격에 있고, 통신비의 문제 역시 통신재벌들의 독과점 가격에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여기에 더해서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상황 때문에 교육과 보건의 공적 지출 비중이 구조적으로 적어 사회보장 시스템이 취약했던 것도 한몫했다.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의 재벌개혁은 지난 1년 동안, 구조적으로 악화되는 불평등 → 경제위기로 인한 물가부담과 소득 정체 → 독점재벌들의 독과점 가격과 정부의 취약한 공적지출에 대한 분노 → 30만이 참여하는 저항과 재벌개혁 요구 → 재벌 해체에 준하는 개혁 방안 결정이라는 긴박한 과정을 밟아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짧은 기간 초고속 재벌개혁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시민의 저항운동이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나라도 2011년 초부터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재벌개혁 논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정치권의 정치일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다. 결국 4.11 총선에서는 재벌개혁 논쟁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못한 채 야당은 선거에서 패배하고 재벌들은 다시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됐다.

지금 재벌개혁을 시작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힘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김병권 기자는 새사연 부원장입니다.



태그:#재벌개혁, #재벌개혁 시민연대, #이스라엘 재벌개혁, #금산분리, #지주회사 출자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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