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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입구
 광산 입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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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 덩어리가 굴러다닐지도 모르니 잘 살펴보세요. 큰 거 찾으면 꼭 얘기 하고요."

광산을 여행 한다고 하자 현진 아빠가 한마디 한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다. 현진 아빠는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후배다. 현진 아빠가 얘기 한 '큰 것'을 그 옛날 광부들은 '노다지' 라 불렀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광산, 그곳에 발을 딛는다고 상상하니 야릇한 흥분한 일었다. 이미 오래전에 가동을 멈춘 폐광이라 노다지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광부들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느낌만은 맛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느껴졌다.

4월 27일 오전 11시께, 광명시 '가학광산'을 찾았다. 가학광산은 폐광이다. 1912년 시흥광산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고 광물을 채취 하다가 1972년, 꼭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동안 채취한 광물을 보니 아무래도 현진 아빠가 말하던 '금덩어리'는 없을 듯했다. 60년 동안 은 6070kg, 동 1247톤, 아연 3637톤을 캤지만 금은 52kg밖에 캐지 못했다.

일행은 다섯 명, <오마이뉴스> 유혜준 기자와 나, 그리고 광명시청 홍보실 직원 셋이 함께 했다. 유혜준 기자는 이날 광산을 취재 하러 나왔고 난 광산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 나섰다. 광명 시청 홍보실 직원들은 유혜준 기자 취재 도우미였다.

반짝이는 돌, 전시용품
 반짝이는 돌, 전시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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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입구에 서자 서늘한 기운이 밀려 왔다. 곡괭이, 삽 따위를 손에 든 광부들이 이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광산에 발을 들여 놓았을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릿했다. 광산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삭신을 쑤시게 하는 힘겨운 '노동'이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른 바 노가다 판이라고 하는 아파트 공사장을 전전한 적이 있었다. 안전모를 쓰고 공사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무겁던지! 아마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훨씬 더 했겠지.

광산 안에 발을 들이면서 '혹시 무너지는 일은 없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쳤다. 이 생각을 눈치 챘는지 광산 관광 해설사가 "그동안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또 세밀한 안전대책도 세우고 있고요"라고 말했다.

광산 안의 온도는 일 년 내내 12도로 유지 된다. 그래서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광명시는 이 광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1년 내내 12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개발만 잘 하면 사시사철 관광객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광명시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이 광산을 작년 8월부터 일반에 개방했고 올 4월까지 약 2만 5천 명의 관람객이 왔다갔다고 한다.

가학광산 내부는 온통 돌이다. 돌 표면이 조명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났다. 이렇게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빛나는 부분이 은이나 동 같은 광물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광부들은 이 돌을 캐서 밖으로 날랐고, 그 돌들은 트럭에 실려 제련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나무계단
 나무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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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광산은 이미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내부에는 조명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위 아래로 뚫린 너른 동공 한 곳에는 음악회를 열 수 있게 무대와 객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 광명시립합창단이 이곳에서 연주회를 한다.

유난히 천정이 낮은 갱도가 보여 유혜준 기자에게 "저 곳은 가지 말죠, 허리 아플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무슨 소리야, 끝까지 둘러 봐야지, 키도 별로 안 크면서……"라더니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키' 얘기에 살짝 빈정이 상했다. 그래도 내 또래(40대)에서는 대한민국 남성 표준인데! 내 키는 약 172cm다. 키에 '약'이 붙는 이유는 아침과 저녁에 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와 키가 거의 비슷한 동굴 해설사, 내 키보다 최소 5cm는 커 보이는 광명시청 홍보팀장은 허리를 내내 구부린 채 유혜준 기자 뒤를 따랐다. 아담한 키의 유혜준 기자는 대부분 허리를 꼿꼿이 핀 채 앞장서 걸었다.

우리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했던 갱도는 가학동과 소하동을 직선으로 관통하고 있어 폐광이 된 이후에는 이 갱도를 잘 아는 이 지역사람들이 지름길로 이용했다고 한다. 가학동에서 소하동으로 넘어가려면 산을 돌아서 가야 하는데 이 갱도를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하동으로 통하는 입구는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막아 놓았다.

광산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작은 바늘이 12자를 가리킨다. 광산 안을 둘러보는데 50분 정도 걸렸다. 겨우 50분 간 지하세계에 있었을 뿐인데도 그 새 바깥세상이 반갑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푸른 나무와 붉은 흙이 우릴 반겨 주는 듯 했다.

연리지
 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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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쭉 뻗어 있는 가파른 나무 계단이 유난히 산뜻해 보였다. "저 계단이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인가요?"라고 물으니 홍보실 직원이 "네 곧장 올라가면 가학산 정상이 나오고요, 그 곳에 가면 소래 앞 바다도 보일 거예요"라고 알려준다.

소래 앞 바다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산 위, 먼발치에서 파란 바다를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눈이 마주친 유혜준 기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라가자는 뜻이다. 혹시 너무 높아 올라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얼마나 걸려요?" 물었더니 광명시청 홍보실 직원이 "계단 끝나는 지점에서 2분 정도만 더 올라가면 돼요"라고 대답했다. 그리 높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라는 뜻이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 다리가 뻐근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계단이 많았다. '계단 끝에서 2분이라고 했으니 곧 바다가 보이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20분 이상을 더 헐떡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갔지만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가학산 정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속았다는 걸 눈치 챘다. 친절한 광명시청 직원이 '아름다운 가학산'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를 속인 것이다.

등에서 땀이 흐를 때 쯤, 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달라붙은 나무가 보였다. 이 나무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몇 년, 아니면 몇 십 년. 잠시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유혜준 기자가 "이거 연리지네"라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 하듯 말했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가 서로 엉켜 마치 한 개의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이다. 매우 희귀한 현상으로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며 예전에는 효성이 지극한 부모와 자식을 비유하기도 했다.

"연리지도 보고, 속아서 올라온 보람이 있네요"라고 말하자 유혜준 기자가 "그러게. 오늘 귀한 것을 봤어, 역시 인생에 공짜는 없어"라고 맞장구를 쳤다.

산불 감시탑
 산불 감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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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가 있는 장소에서 20분 정도 더 올라가서야 산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파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산과 들, 그 사이에 삐죽삐죽 솟아있는 아파트뿐이었다. 마침 산불 감시원이 산불 감시탑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서 바다가 보인다는데요, 어디가면 볼 수 있지요?"
"바다요? 아! 아주 맑은 날엔 보입니다. 바로 이곳에서요."
"근데 이렇게 맑은 날 왜 안보이지요?"
"더 맑아야 돼요, 지금은 연무 때문에 안 보여요."

속았다! 바다가 보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아주 맑은 날에는 보인다고 하니 거짓말이 아닌 건가? 어쨌든 그날, 그 자리에서 바다를 보지 못했으니 내 입장에서는 속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덕분에 가학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좋은 의미의 거짓말이었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광부들의 땀이 곳곳에 배어 있는 멋진 광산을 구경했고, 거짓말(?)에 속아 그 귀하다는 연리지도 보았기 때문이다. 모처럼 등산도 했다. 노다지를 보고 환호하는 광부는 없지만 그 느낌은 갱도 안 곳곳에서 감지 할 수 있었다.

좋은 느낌이 오래 남는 폐광산 여행이었다. 도심에서 광산을 보고 싶다면, 가학광산으로 가볍게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서울 근교인 광명시에 있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공정여행 기사응모



태그:#가학광산, #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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