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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1일,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고 넘어 꽃차남이 태어난 날.
▲ 꽃차남이 오다. 2009년 5월 11일,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고 넘어 꽃차남이 태어난 날.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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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원래 힘이 든다. 온갖 짐짝들이 내 어깨에만 얹혀 있는 것 같아 저절로 인상이 더러워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2009년 5월 11일을 생각한다. 그날, 아기를 낳았다.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고 넘어 마침내 나를 찾아온 아기, 꽃차남.

임신 7개월째에 진통이 왔다. 동네 산부인과에 입원한 지 일 주일 만에 대학병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갑자기 떠나온 집도, 일터도, 남편도, 큰아이도, 뒷전이었다. 주말이 오는지, 봄이 와서 꽃이 피는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기가 내 뱃속에서 한순간이라도 더 머물 수 있게, 나는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누워서만 지냈다. 한 밤 자고 일어나면 열흘씩 건너뛰어 있기만을 바랐다. 병실에 온 남편이 돌아가고, 동생 지현과 친정 엄마가 돌아가고 나면, 눈물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짐작도 안 되는 우주 먼 곳에 있던 아기를 내 몸으로 불러와서는 나는 어미로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도 하느님도 장담할 수 없는 아기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연하게 버티는 건데 그것도 잘 못했다.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

뱃속에서 갑자기 호흡을 멈춘 아기를 출산 예정일보다 3주 앞서 초긴급 제왕절개 수술로 꺼냈다. 아기는 건강했다. 그때 세상은 내 것이었다. 보통의 아기보다는 칼슘 수치가 낮아서 제 때에 퇴원할 수 없었지만 내 눈 앞에 아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일터에서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 하고 하루만인 5월 18일에 퇴원했다. 남편은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가고 나는 아기를 안고 기다렸다. 지나는 할머니가 "갓난아기네!"하고 우리 아기를 고운 눈으로 들여다 보았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장하게 태어난 아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보, 퇴원하는 날짜도 멋있다. 광주민주항쟁 기념일이잖아. 근데 있지, 이번에는 상가 집 가면 안 돼. 진짜 안 돼."

큰아이와 꽃차남의 터울 10년, 그 사이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 큰애 낳고 삼칠일이 안 됐을 때에 남편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부모님은 아기 낳은 사람은 상가 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남편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갔다 왔다.

우리 아기는 울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었다. 큰 병원의 의사는 백일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현자들은 말했다. 6개월이 지나면, 돌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그러나 손주를 열 명이나 본 어머니는 아기가 울다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으셨다.

나는 일터에서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기를 데리러 가서도 울음소리가 무서워 도망치다가 달리기를 잘 하게 됐다. 전생도 생각했다. 우리 아기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가였어. 잠 안 재우는 고문에서 무릎을 꿇고 동지들의 은신처를 밝혀버린 거야.

'싸가지 없는' 내 품성이 미안했다

어느 날에는 남편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재가 되어 먼 길 가는 친구를 직접 뿌려주고 왔다. 큰애는 여전히 울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방법으로 무당에게 갔다. 당골네는 죽은 이의 영혼이 우리 큰애에게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큰 돈 들여 굿을 하며 말했다.

"○○아, 우리 애기 좀 봐 다고."

큰애 낳고 삼칠일도 안 됐는데 상가집에 다녀온 남편. 그 뒤에는 갑자기 세상 떠난 친구의 장례 마무리까지 하고 온 남편. 그 때문이었을까? 우리 아기는 24개월이 되도록 울었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하시고 시민 상주 하는 남편 큰애 낳고 삼칠일도 안 됐는데 상가집에 다녀온 남편. 그 뒤에는 갑자기 세상 떠난 친구의 장례 마무리까지 하고 온 남편. 그 때문이었을까? 우리 아기는 24개월이 되도록 울었다.
ⓒ 우리집 남편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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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꽃차남이 세상에 온 지 12일째. 산후조리해 주는 아주머니가 출근해서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그가 위독하다고. 텔레비전을 켜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아기 기저귀를 사야겠다고 나와 집 밖에서 주저앉았다. 그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화냈던 기억만 났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했을 때였다. 그가 부산에서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을 때에 군산에서 부산까지 찾아갔던 남편에게, 변함없이 그의 편이지만 무명의 한 사람인 남편에게, 아침밥 먹다가 따진 적이 있었다.

마음에 걸렸다. 그때 나는, 내 자매처럼, "오죽 했으면 그랬겠냐?" 하지 못했을까? '싸가지' 없는 내 품성이 미안했다. 그래서 그가 간 뒤부터는 중심 잡는 것에 마음을 뒀다. 작년에 너도나도 곽노현 교육감을 흔들어도, 대가성 돈을 주지 않았다는 교육감의 진실을 보았다.

꽃차남은 큰애와 다르게 잘 먹고 잘 잤다. 그래서 내 세계는 평온의 철갑을 두른 줄 알았는데 그가 떠났다. 남편은 시민 상주를 했다. 동생 부부도 그의 분향소에 다녀와 꽃차남을 안았다. 분향소에 다녀와서 쓴 큰애 일기를 읽으면서 오래 울었다. 상가 집 걱정은 안 했다.

우리를 사랑한 그였으니까, 우리 아기쯤은 건강하게 키워줄 거라고 여겼다. 과연, 꽃차남은 백일 되기 전에 10kg이 넘었다. 지금은 '고추 들어간 여자애'들만 좋고, 예쁘니까 제 이모 목걸이라도 여자 친구한테 갖다 주고 싶어 할 만큼 자랐다.

그가 떠난 달... 벌써 3주년, 나는 기도한다

그가 떠나자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 그를 향해 화냈던 기억만 났다. 
남편처럼, 내 자매처럼, 헤아리려고 하지 못했을까?
▲ 이라크 파병 현장에 찾아가신 노무현 대통령 그가 떠나자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 그를 향해 화냈던 기억만 났다. 남편처럼, 내 자매처럼, 헤아리려고 하지 못했을까?
ⓒ 우리집 남편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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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들면 꽃차남이 태어나던 봄날을 생각한다. 지난해 4월, 나는 C형 간염에 걸린 걸 알았다. 나 혼자만의 병이니까, 내 새끼하고 엮인 게 아니니까, 낙담하지 않았다. 피로 전염된다는 병, 그러니까 '드라큘라병', 혹은 '이국적인 병'이라고 낄낄거렸다.

지난해 8월에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 드리는 기도는 이루어진다는데 내 몸의 건강을 빌지 않았다.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난 후배의 동생과 "잘 가요, 노무현.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라고 말한 한 남자, 그리고 함께 서 있는 세 남자를 위해 기도했다.

가을부터 매주 주사를 맞는 본격 투병이었다. 어느 날부터 머리카락이 듬뿍 빠지고,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며 면역력이 약해졌다. 감기에 걸려도 집에서 1시간 거리인 대학병원에 가야 했다. 잠이 안 오고, 자주 토를 했다. 소파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으면 꽃차남이 말했다.

"엄마, 들어가 주무세요. 형형은 내가 볼게요."
"(푸하하하!) 어떻게 볼 건데?"
"울면요, 장난감 주고요. 오줌 마렵다고 하면, 화장실 흰 변기통에 데려갈게요."

그가 떠날 때 태어난 꽃차남이 그의 무덤에 국화꽃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 봉하마을 그가 떠날 때 태어난 꽃차남이 그의 무덤에 국화꽃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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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길 좋아해서 '체육인',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글루미 썬데이'인 나는 겨울 내내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 올해 2월에 단 한 번,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과 그가 나고 자란 봉하 마을만 갔다. 차에서 자다 깬 꽃차남은 울지 않고, 그의 무덤에 국화꽃을 바쳤다.

간염 투병이 끝나기도 전에 합병증으로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왔다. 임신 때 말고는 살이 올라본 적 없는 몸이 자꾸 불어나는 듯 갑갑하다. 별 거 아닌 일에 성질을 내고 후회해서 '쪽팔리는 병', 또는 '못낸이병'. 나는 남편 앞에서, 동생 지현 앞에서, 대성통곡 하고 말았다.

"없는 미모도 끌어와야 할 나이에 얼굴도 붓고, 성질도 못 돼 쳐 먹어지고. 내 힘으로 조절이 안 돼. 진짜 챙피해서 못 살겠어."

아직도 나는 내 사정 좀 봐 달라는 기도를 하지 못한다. 생사가 걸린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기도를 써 버리면 정작 간절한 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5월, 우리 아기 꽃차남이 태어나고, 그가 떠난 달. 벌써 3주년, 나는 기도한다.

"대통령 욕을 할 수 있었던 그때는 태평성대였어요. 당신이 준 선물이었어요. 5월에는 우리 꽃차남 보듯 당신을 생각해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평온을 빌게요, 노무현."

남편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아날로그 사진. 2001년 9월, 남편은 대통령 출마 선언한 그를 만나러 부산에 다녀왔다.
평범한 사람에게 겸손하게 악수하는 그의 뒷모습이 뭉클하다.
▲ 2001년 대통령 출마 선언 남편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아날로그 사진. 2001년 9월, 남편은 대통령 출마 선언한 그를 만나러 부산에 다녀왔다. 평범한 사람에게 겸손하게 악수하는 그의 뒷모습이 뭉클하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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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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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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