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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한 킬리만자로
 친구와 함께 한 킬리만자로
ⓒ 김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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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름,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최고의 여행을 한 번 해보자는 야심에 찬 각오로 친구와 세계 지도를 펴놓고,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둘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였습니다. 꿈의 대륙. 어릴 적부터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가 바로 우리의 손가락 아래에서 도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로 결정하고, 3일 만에 루트를 정하고 티켓팅까지 마쳤습니다. 아프리카 여행은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마음을 한번 먹으니 이내 가슴 부푼 청춘의 희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여행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동아프리카의 중심지인 케냐에서 끝을 맺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짐바브웨-탄자니아-케냐를 중심으로 이동하며, 그 주위에 있는 나라까지 조금씩 맛보기로 하였습니다.

여행을 약 한 달간 하였는데, 그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펭귄을 만나고, 희망봉에서 미래를 꿈꾸며 함성을 지르던 일,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에서 물 폭탄을 맞던 일, 길거리에 뛰어다니는 야생동물들에 기겁하던 일, 국경에서 발이 묶여 이틀을 기다려야 했던 일, 실컷 잘 달리던 버스가 초원 한복판에 멈춰 서서 히치하이크를 해야 했던 일. 하나하나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프리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킬리만자로 등반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5895m)이자, 우리나라에서도 흘러간 유행가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표범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산입니다.

마랑구 게이트, 고도 1700미터인 지점... 전 세계 등반객이 붐비는 곳

처음에는 감히 배낭여행 중에 5000m가 넘는 고산등반을 할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짐바브웨에서 마음 좋은 음비소씨네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던 날 밤이었습니다. 친구 재훈이 지도에서 킬리만자로 산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킬리만자로 산 정상은 한번 밟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친구는 자신 있는 말투였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국내 산행을 몇 차례 간 경험이 전부인데다 변변한 등산 장비조차 하나 없이 5800미터의 산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던 게지요. 하지만 친구는 예전에 읽은 책에서 나이 드신 분들도 오르는 것을 보았다며, 저를 설득했고 결국 여행이 절반 정도 지난 무렵에 킬리만자로로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킬리만자로 등반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고산등반의 경우, 입산 허가도 필요하고 현지 등반 스태프를 고용해야 하는 등 조금은 까다로운 절차가 있는데케냐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꽤 괜찮은 조건으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국경 나망가로, 다시 탄자니아 아루샤로 이동하고 하루를 묵은 뒤, 킬리만자로 산의 초입이자 마랑구 루트의 출발점인 마랑구게이트(Marangu Gate)에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마랑구 게이트는 고도 1700미터인 지점에 있어, 전 세계에서 모인 등반객들로 늘 붐비고 있는 곳입니다. 다른 등반객들처럼 철저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있는 장비, 없는 장비 다 챙겨서 바로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킬리만자로는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산으로 유명한데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전혀 다른 식생과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첫날은 2700미터까지 고도를 올렸는데, 이날 하루는 마치 우리나라에 있는 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푸르고 울창한 숲 속을 걸었습니다. 고도가 2000미터가 넘었음에도 많은 아이를 볼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탄자니아 현지인 아이들이 우리를 따라오며 '원 딸라, 원 딸라'를 외치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돈을 주지는 못하고 가지고 있던 초콜릿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아이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첫날 도착한 만다라 헛은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추위로부터 체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입고, 따뜻한 물을 먹으며 밤을 보냈습니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아,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3700미터에 있는 호롬보 헛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고도가 3000미터가 넘어가는 만큼 고산병 예방에 만전을 기하며, 수분을 많이 섭취하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등반 가이드 '캡틴'은 언제나 스와힐리어로 '폴레 폴레, 하쿠나 마타타'를 강조했습니다. '천천히만 가면 문제 없어'라는 뜻이었고, 우리는 그 말을 철칙으로 언제나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걸었습니다.

셋째 날은 해발고도 4700미터의 키보헛까지 가는 일정이었는데, 사실상 키보헛은 정상으로 가기 전에 있는 마지막 베이스캠프입니다. 키보로 가는 길은 식물을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길에 자갈이 깔려 있거나 모래사막이었습니다. 고산의 특징이 밤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나 낮에는 기온이 꽤 높게 올라간다는 것이 있습니다. 킬리만자로 산의 사막은 영락없이 우리 머릿속의 그 사막이었습니다. 여담으로 가수 조용필의 노래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킬리만자로 하면 표범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은데, 킬리만자로에는 야생동물이 거의 없습니다. 10년째 산을 오른 '캡틴'도 동물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무슨?... "10년째 야생동물 본 적 없어"

해발 4500미터를 넘어서면서 친구는 고산증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현기증과 무기력함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근육질인데다가 잔병도 앓지 않았던 재훈이 힘들어하자 신경이 많이 쓰였지만 그래도 앞으로 갈 수밖에, 돌아가는 길은 없었습니다.

키보헛에 도착하자 분위기는 지금까지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키보헛은 '고산병자들의 쉼터'라고 불릴 정도로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날 정상 공격을 시도했다가 심한 고산증세로 다시 내려와 휴식하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키보헛에 있는 대다수 사람이 가급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5000미터 고도에 가까워서인지 입맛도 없었고,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오후 5시경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는 바로 밤 12시가 정상 공격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밝으면 기온이 올라가 등반하기가 어렵고, 눈이 녹기 때문에 눈사태의 위험이 있습니다.

오후 11시 반이 되자, 등반 가이드 '캡틴'이 우리를 깨웠습니다. 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왠지 모를 비장감과 함께 등반 채비를 다시 챙겼습니다. 자정의 킬리만자로는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보석처럼 박힌 수천 개의 별이 머리 꼭대기를 비추었습니다. 오로지 앞사람의 발 뒤꿈치만 보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정상 공격을 시도한 다른 등반대들 가운데에는 심한 고산증 때문에 구토하며, 하산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긴장을 하고 '폴레 폴레, 하쿠나 마타타'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한발 한발 내 딛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5000미터의 공기. 그 공기 속에 포함된 희박한 산소를 쉴 새 없이 들이켜며 오로지 걸음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산을 올랐습니다. 4시간여를 말을 한 마디하지 않고 내딛는 끝에 저 멀리 정상임을 알리는 팻말이 보였습니다.

'캡틴'은 정상에 닿기 직전 살짝 비켜서 주며, 그날 첫 정상 등반자의 영광을 제게 양보해주었습니다.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 김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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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NOW AT UHURU PEAK, TANZANIA 5895M'

사실 팻말을 보고 감동에 빠져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손발은 이미 얼어붙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감각이 없었고, 숨은 턱 끝까지, 아니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라 있었습니다. 서둘러 등정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하산길에 나섰습니다. 하산하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30분 여를 정신없이 내려오는데, 저 멀리서 해가 솟는 것이 보였습니다. 발밑에서 구름을 뚫고,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이틀이 걸려 킬리만자로를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은 이곳저곳 삐걱거리고 통증을 호소했지만, 아프리카 최고봉을 올랐다는 그 가슴 벅찬 감정에 젖어 마음 만은 가벼웠습니다. 킬리만자로는 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히말라야도 등반하고 다른 세계의 오지도 다녀보았지만, 그때 22살 대학생으로서 올랐던 킬리만자로 정상의 느낌은 정말 특별한 감정으로 남았습니다.

저의 킬리만자로가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프리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의 여행이 현지인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한 번 있었습니다.

갑자기 돌변한 '캡틴'... 당황했지만 가슴 아팠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지만, 지금까지도 고마운 '캡틴'
▲ 캡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지만, 지금까지도 고마운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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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등반 가이드 '캡틴'은 자신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자신에게 돈이 얼마나 필요한 지에 관한 이야기,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의 학비에 관한 이야기, 이 등반 가이드라는 직업과 평균 40세의 수명 이야기. 계속해서 자신의 슬픈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이것이 '팁'에 대한 암시임을 몰랐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묵었던 만다라 헛에 도착하자, 캡틴은 노골적으로 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등반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게는 최소 여비인 20달러가량 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요구였습니다.

이곳 사정을 알 리가 없고, 처음 계약 당시에도 팁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에 캡틴의 강한 요구는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협박으로 보였습니다. 캡틴과 스태프들은 우리의 오두막을 둘러싸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우리는 오두막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고 버텼습니다. 등반 기간 내내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주었고, 마지막에 최초 등반자의 영광도 양보했던 배려심 많던 캡틴은 어느새 우리를 가둬놓고 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그들이 보여주었던 그 순박한 웃음은 어느새 차가운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돈이 당장 없었기에 줄 수도 없었고, 그런 식으로는 팁을 내기도 싫었던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여 일단 내려가서 이야기하자고 산의 초입 마랑구 게이트로 다시 향했습니다. 마랑구 게이트에서 우리의 등반 인증서를 발급받게 되어 있었는데, 발급을 위해서는 캡틴의 서명이 필수였으므로 혹시 팁을 주지 않았다고 등반 인증서를 발급해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려와 달리 인증서 발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나 캡틴과 가이드들의 팁 요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금액은 1인당 100불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는데, 당시 우리 수중에는 그런 큰 금액이 있지도 않았으며 팁 비용만으로 500불 이상 지출한다는 것은 총 여행경비가 4000불이었던 가난한 배낭 여행자인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돌아오는 차에 탑승했지만, 바퀴가 구르기 시작할 때까지 그들의 원망스런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해 풍족했습니다.

당장 입고 있는 옷 만해도 그들은 살 수 없는 브랜드의 옷이었고, 한국에서 먹는 밥 한 끼면 그들을 며칠을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난한 이들에게 상처를 입은 것 같다는 기분에 킬리만자로를 떠난 며칠 동안 계속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날의 그 미안한 감정, 그들의 원망스런 눈빛은 잊을 수 없습니다. 1000불이나 되는 금액을 대행사에 지불했지만, 실제로 '노동자'인 가이드와 캡틴에게 돌아가는 금액은 그 금액의 10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은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본 뒤였습니다. 2009년의 킬리만자로는 인생 최고의 기억이자, 동시에 가슴 아픈 사연을 함께 간직한 역사로 남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공정여행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킬리만자로,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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