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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나는 왜 아프리카에 왔나
 
아프리카에 오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신앙적 동기이고 또 하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교회 권사이신 어머니가 지난해 7월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다녀오시면서 짐바브웨 한인교회 목사님과 인연을 맺으셨다. 그렇게 부모님이 아프리카를 추천했고 나는 가난한 이웃을 도우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싶어서 짐바브웨 행을 택했다.
 
무슨 영어를 아프리카로 배우러 가느냐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짐바브웨의 역사를 알면 그렇게 시비를 건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짐바브웨는 영국의 식민지국가였기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짐바브웨국립대가 한때 세계 명문대학 100위권에 속했을 정도로 교육 강국이었던 곳이 짐바브웨이며 교육열에 관해서는 한국 못지않은 나라이다.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갇힌 땅, 좁은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국 청년들은 수능, 스펙, 취업, 결혼 등의 인생 계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벗어나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그 인생이란 마치 당근을 한 입 베어 먹기 위해 채찍을 맞으며 달리는 경주 말과 같은 처지이다. 나는 그런 강요와 희생에서 자유롭고 싶어졌고, '인생은 어차피 조금씩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아프리카로 향했다.
 
2012년 4월 현재, 나는 아프리카 남부(Southern-Africa)에 위치해 있는 '짐바브웨'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해 9월에 한국을 출발했으니 벌써 7개월째가 됐다. 스물넷 청년에게 짐바브웨는 낯설고, 두렵고, 궁금하고, 무엇보다 엄청 머나먼 나라이다. 그래서 스물넷의 시선으로 바라본 짐바브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인생을 기록하려고 한다. 짧은 기간의 경험이기 때문에 어설픈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제대 후 선택한 아프리카 행... '기대 반 걱정 반 괜찮을까?'
 
어렸을 적, 피부가 까만 사람을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렸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만난 검은 피부의 그 사람은 미국 출신이었다. 다큐멘터리나 스페셜 프로그램 등이 아니면 뉴스에서도 접하기 힘든 아프리카. 아프리카 하면 기아, 무더위, AIDS, 물을 기르기 위해 매우 먼 곳까지 가는 소녀 등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어디일까?"하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아프리카요!"라는 대답이 많이 나올 것이다.
 
"제대하고 바로 외국 나간다."
"어디로?"
"아프리카로!"
 
지난해 8월 공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9월에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군 제대 후 출발하기까지 한 달 동안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 전부터 가고 싶었던 호주나 뉴질랜드였다면 기대만 했을 텐데, 아프리카로 방향이 갑작스럽게 선회하면서 조금은 두려웠다.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아프리카에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거리에는 사자와 얼룩말들이 지나다니고 뜨거운 햇빛과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장면 등을 상상했다.
 
'짐..바..브..웨..'
 
아프리카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걱정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짐바브웨 100조 달러', '짐바브웨 슈퍼 인플레이션', '짐바브웨 대통령 장기집권' 등의 관련 검색어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검색하기가 무서워졌다. 스물넷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외국 땅을 밟으려고 하는데 그 대륙이 하필이면 아프리카. 정말 잘 결정한 일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적게나마 회의감을 가졌다.
 
비행기를 하루 이상 타고 가야하는 아프리카. 인천공항을 출발해 태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에티오피아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짐바브웨 하라레 공항. '비자'와 '여권'의 차이도 몰랐던, 군대에서 사회로 막 나온 사회초년생에게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압박으로 다가왔다. 다른 항공편으로 편히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내 호주머니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아끼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스물넷 촌놈의 인천공항 이용기... '너 아버지한테 잘해라'
 
인천에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인천의 이곳저곳을 다녀봤지만 정작 인천공항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인천국제공항 민영화 반대를 위해 거리시위를 나갔을 때 사진으로만 봤었지 실제로 얼마나 큰지 몰랐다. 외국 경험이 많은 친구가 비행기 타기 전 날에는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하기에 밤을 새운 채 많은 짐들을 들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누가 비행기 처음 타보는 사람이 아니랄까봐 공항패션으로 폼도 좀 잡았다. 사람 구경, 공항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부모님 그리고 친구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2년 전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처럼 부모님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환하게 웃었다. 부모님과의 이별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초과된 짐이었다. 이민 가는 것처럼 많은 짐을 챙겼기 때문이다. 통기타까지 손에 들려있어서 걱정했다. 짐을 초과했다고 통기타를 받아주지 않는 것 아냐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화려한 면세점 등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생애 첫 해외여행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세계에서 가장 친절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승무원 누나가 내 기타를 짐칸에 넣어주셨고, 내 자리를 찾았다. 자리에 앉아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아직 인사를 전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친구 놈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너 아버지한테 잘해라, 아까 너 게이트 들어갈 때 아버지 눈물 보이시더라.'
 
'다 큰 아들 뭐 그렇게 걱정스럽다고 눈물을 보이셨을까'라고 생각하며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출발 전까지 짐을 쌌다 풀었다 하는 나를 나무라시던 아버지. 군대를 제대했는데 오히려 버릇이 없어졌다며 화를 내시던 아버지셨다. 다른 아버지와는 다르게 요리와 집안일을 많이 하시고, 썰렁한 유머를 계속 반복하시는 아버지. 그러나 정말로 강한 분이셨는데. 아버지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눈물이 자꾸 흐르려고 해서 큰 숨을 들이마시며 눌러보았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핸드폰을 모두 끄고, 안전벨트를 매며 움직이는 비행기에 초행자의 몸을 맡겼다. 자동차 창문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인천의 풍경과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의 하늘을 당분간은 못 보겠네!'


태그:#짐바브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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