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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하 조정중재원)이 지난 8일 개원했다. 이날부터 발생한 의료사고와 약화사고에 대해서는 환자나 의료인 모두 조정중재원에 조정과 중재를 신청할 수 있다. 조정, 중재 기간은 최대 120일이다. 비용도 일정액의 수수료만 부담하면 된다. 의료소송이 1심만 평균 26개월이 소요되고 소송비용도 착수금 500만 원 이상, 성공보수금 10~25%임을 고려하면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료소송에서 환자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입증부담도 줄게 되었다. 의료인 2명, 검사 1명, 변호사 1명, 소비자권익위원 1명으로 구성된 '의료사고감정단'에서 의료과실 유무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조인 2명, 보건의료인 1명, 대학교수 1명, 소비자권익위원 1명으로 구성된 '의료분쟁조정위원회'에서 손해배상액을 산정하거나 조정, 중재결정을 한다.

 

의료계의 불참, 의료분쟁조정제도 발목 잡다

 

우리나라 의료소송의 특징이 '고액의 소송비용, 장기간의 소송기간, 입증의 어려움'이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의심되어도 환자는 경제력과 인내심, 그리고 의학적 전문성까지 갖추지 않으면 백전백패(百戰百敗)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의료소송의 높은 문턱이 의료사고 피해자나 가족들로 하여금 시위나 농성 등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하였다.

 

이제 의료사고가 발생해도 환자들이 조정중재원을 통해 저비용으로 신속한 피해구제를 받는 길이 열렸다. 환자로서는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조정중재원이 출범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의료계의 불참으로 '의료분쟁조정위원회'와 '의료사고감정단'이 아직도 구성되지 않았다. 특히,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신임 집행부는 회원들에게 환자의 의료분쟁조정 신청에 응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서신까지 발송했다고 한다. 의협에서 주장하는 독소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협은 "의료사고감정단 내 감정부의 출석 요구, 자료제출 요구, 소명 요구에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경우 5백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과 감정위원 또는 조사관의 조사, 열람, 복사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경우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부과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협 신임 집행부의 주장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하 의료분쟁조정법)이 지난 17대, 18대 국회에서 어떠한 제정과정을 거쳤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한 오해라고 생각된다.

 

'의료분쟁조정법'에 대해서는 지금도 환자단체를 제외한 대부분 시민사회단체는 반대하고 있다. 이유는 입증책임 전환규정이 빠졌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의료인에 대한 형사처벌특례까지 부여한 '의료분쟁조정법'에 찬성할 리가 없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입증책임 전환규정' 포함된 '의료분쟁조정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상임위원회에서 의사출신 안명옥 의원이 주도해 강하게 반대했고, 그 이후 법안 논의는 중단되었고 결국 국회 회기종료로 폐기되었다.

 

18대 국회에서는 '입증책임 전환규정'이 빠진 '의료분쟁조정법'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입증책임 전환규정이 빠졌는데도 형사처벌 특례를 인정하는 것은 의사특권법이라고 시민사회단체에서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 후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1년 이상 잠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회기종료로 법안이 또 폐기되는 것이 환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반영되어 어렵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했었다. 

 

의료분쟁조정중재의 핵심은 의료사고감정이다. 객관적인 감정을 위해서는 출석, 자료제출, 소명 요구와 조사, 열람, 복사는 필수적이다. 의료기관에서 이를 정당한 이유도 없이 거부한다면 의료사고를 은폐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감정단의 조사 및 자료제출 요구를 거부하면 과태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사협조의무 및 거부시 처벌규정"은 입증책임 전환규정의 대안으로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환자단체 입장에서는 입증책임 전환규정에 비해 대폭 후퇴된 내용이다. 그런데도 이 규정 때문에 의협이 의료분쟁조정제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의료과실 있는 경우, 환자로서는 소송보다 조정이 유리

 

둘째, 의협은 "환자는 언제든지 조정을 거부하고 소송으로 전환할 수 있어, 의사가 제출한 각종 서류가 환자측 소송을 위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서 의료인에게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도 언제든지 조정을 거부할 수 있어서 불리할 것이 없다. 또한, 의사가 조정에 임하는 경우는 의료과실이 분명한 경우나 의료과실이 의심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만일 조정절차 중 환자가 조정을 거부하고 그동안 확보한 유리한 증거자료를 가지고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환자로서는 오랜 소송기간과 고액의 변호사비용을 감안하면 손해배상액이 조정에 비해서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의협의 우려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셋째, 의협은 "불가항력에 의한 산부인과 분만사고로 산모가 사망하거나 신생아가 뇌성마비 또는 사망한 경우 3000만 원 한도로 보상하는 재원을 의사가 일부 부담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에 대해서는 진실발견 노력보다는 손쉬운 보상을 선택하는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어 시민사회환자단체는 제도도입 자체를 반대했었다. 기획재정부도 지난 23년 동안 줄기차게 반대했었다. 이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입증책임 전환규정을 삭제한 '의료분쟁조정법'을 통과시키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해 막판에 졸속으로 끼워 넣은 규정이다.

 

보상 규모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는 당연히 비용부담에 난색을 보였을 것이고 보건복지부는 제정된 법률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정부와 분만 실적이 있는 의료기관이 각각 7:3의 비율로 분담토록 했다. 의료기관실부담액이 분만 건당 2862원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금액이라면 출산장려 차원에서 무과실보상의 대원칙대로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옳다. 의협은 우선 의료분쟁조정제도가 정착되도록 협조하고 정부와 협의해 개선점을 찾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넷째, 의협은 "조정중재원이 언제라도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통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대불제도'를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료사고 때 신속한 손해배상의 담보는 의료사고 피해자에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환자단체는 의료인의 책임보험 의무가입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의료계의 과도한 부담을 고려해 TF까지 구성해 '손해배상금대불제도'를 고안했다. 이 제도는 외국에서도 벤치마킹할 정도로 의료사고 손해배상 담보제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의료계에서 왜 반대하는지 알 수 없다.

 

출산장려 차원에서 불가항력에 의한 분만사고, 정부 보상이 타당

 

의료분쟁조정제도는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를 신속 공정하게 구제할 뿐 만 아니라 의료인의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정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다. '조정제도'의 속성상 환자와 의료인 모두 한보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의협 신임 집행부가 의료인에게 불리한 몇 가지 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의료분쟁조정제도 자체를 보이콧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시민사회환자단체도 입증책임 전환규정 신설과 형사처벌특례조항 삭제를 요구하면서 의료분쟁조정제도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의료분쟁조정법'은 의협의 요구로 제정 논의가 시작되었고 법무부(형사처벌특례), 기획재정부(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의 반대와 입증책임 전환규정 도입 논쟁으로 23년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제정되었다. 의료관광 활성화와 외국인환자 유치를 위해서는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이 필수적이었던 보건복지부가 그동안 반대해 왔던 법무부와 기획재정부를 겨우겨우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의료분쟁조정제도는 환자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의사를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 의사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환자를 위한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논의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했던 그룹이 의협이다. 제도시행 후에 반대하는 방법보다는 우선 시행에 협조하고 문제점이 있다면 이후 개선을 요구하는 성숙한 모습을 환자들은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안기종 기자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상임대표 입니다.


태그:#의료사고, #의료분쟁, #환자단체연합회, #환자, #의료분쟁조정중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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