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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촬영한 군산의 전북자전차점. 부근에 크고 작은 정미소가 많았다고 한다.
 1934년 촬영한 군산의 전북자전차점. 부근에 크고 작은 정미소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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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소화 9년(1934) 당시 군산부(府) 사이와이마치(幸町)에 있던 '전북자전차점' 주인과 종업원들이다. 일제강점기 관공서와 수탈의 현장 등 안타까운 장면만 봐오다가 사람 냄새나는 사진을 대하니까 고향 어른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사진 주인 이종남(78세) 어른은 "해방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이규철)가 1932년 자전거포를 개업하고 2년 후 종업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고 말했다. 한 번쯤 뵌 듯한 얼굴들이어서 보고 또 보고, 유심히 살펴봤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는 분은 없었다.

유려한 필치의 예서(隸書)체 간판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아무리 간판글씨라고 하지만, 획에 힘이 실려 있고, 변화와 '여백의 미(美)'가 살아있어 유명 서예가의 현판글씨가 떠올랐다. 전시실에 걸려 있어야지 간판으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간판 상단에는 '중고자전차판매'라고 쓴 한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중간에는 상호, 하단엔 전화번호(530번)가 적혀 있다. 이종남 어른은 "당시 전화를 취급하던 군산부 우체국에 전화선이 부족해 이웃집과 함께 사용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간판이 '全北'으로 시작해서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자전거는 물론 발전기, 라이트 등 주요 부속을 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입해왔다는 얘기를 듣고 풀렸다. 가게는 살림집까지 합해서 10평 남짓 됐지만, 거래 규모는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컸단다.

내항이 보이는 장미동. 오른편 ‘서해식당’ 자리가 전북자전차점. 약 100m 떨어진 곳에 유명한 화강정미소가 있었다.
 내항이 보이는 장미동. 오른편 ‘서해식당’ 자리가 전북자전차점. 약 100m 떨어진 곳에 유명한 화강정미소가 있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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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포가 들어선 거리(幸町)는 일본 배에 쌀을 선적하는 부두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장미동(藏米洞). 크고 작은 방앗간과 쌀 창고가 많은 '정미소 거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게 앞 로터리는 강호정(현 죽성로), 본정통(현 해망로), 째보선창, 내항으로 갈라지는 군산의 교통 중심지였다.

코흘리개 시절 뛰놀았던 동네를 찾아간 이종남 어른은 "내가 어렸을 때는 부근에 붕어와 미꾸라지 등이 헤엄치는 개울이 흘렀고, 밤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했었다"며 "도로가 무척 넓었는데 좁아졌고, 사람도 많이 다녔는데 너무 한산하다"면서 회상에 잠겼다.   

뒷맛이 씁쓸했던 '독창회 포스터'

관옥민자 독창회 포스터(좌)와 일본 내셔널 회사가 제작한 1930년대 광고판(우)
 관옥민자 독창회 포스터(좌)와 일본 내셔널 회사가 제작한 1930년대 광고판(우)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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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포 입구 오른쪽 기둥에 걸린 간판 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밑으로 내려쓴 일어(ナショナルランプ)와 한자(乾電池)는 '내셔널 램프 건전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상단의 한자 '경제제일(經濟第一)'은 무엇을 뜻하는 글귀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이종남 어른은 군산에서 제작한 간판이 아니고, 자전거 부속(전등, 건전지, 발전기 등)을 만드는 회사(내셔널)에서 보내준 광고판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는 순간 '경제적인 상품', 즉 '값이 저렴한 알뜰상품'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과 연예인 사진이 들어간 극장 포스터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는데, 자전거포 진열장 상단의 포스터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아니면 조선 악극단 공연 포스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확대해서 보니 일본의 여류 성악가 관옥민자(関屋敏子) 독창회가 14일 오후 7시 군산 공회당에서 열린다는 포스터여서 아쉬웠다. 1934년 당시 군산부 인구가 전주를 앞섰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유명한 성악가 독창회를 군산에서 개최하다니 한편 놀라웠다.

네이버 검색에서 "소프라노 가수 관옥민자 일행이 황군위문(皇軍慰問)의 귀도(歸途)를 이용하여 '부민관'에서 공연한다"는 1939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조선, 중국, 일본인이 섞여 사는 군산에서 주인 노릇은 점령군처럼 들어온 일인들이 했음을 알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 

지금쯤은 팔순 노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가 사진사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자전거에 가려있어 아쉬웠다. 보릿고개에는 콩깻묵도 먹기 어려웠다는 1930년대 군산의 아이들 옷차림은 어땠는지 알아볼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였다.

쌀이 산처럼 쌓여 있는 1930년대 군산항 부두. 지금의 내항이다.(출처, 군산시청)
 쌀이 산처럼 쌓여 있는 1930년대 군산항 부두. 지금의 내항이다.(출처, 군산시청)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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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촬영한 1934년은 제3차축항공사가 완공(1916~1933)된 이듬해로 창고마다 흰쌀이 산을 이루면서 일제의 쌀 수탈이 200만 석을 돌파한 해였다. 하여 일본인, 아니면 부자들이나 타고 다녔다는 자전거포도 호황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웃에는 동해루(東海樓)와 함께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으로 알려진 평화원(平和園)이 있었는데 몇 년 후 영화동으로 이사했단다. 재미있는 것은 평화원 주인이 이종남 어른의 대부(代父)였고, 지금은 부인이 다른 화교의 대모(代母)가 되어 끈끈히 지내고 있다는 것.

일제강점기 자건거포 단골은 식당, 주조장, 쌀가게 등

이종남 어른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달력을 오려 자전거에 번호를 붙이던 기억이 난다"며 "한때는 자전거를 30대 넘게 진열해놓고 매매도 하고 대여도 해주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를 렌트해서 김제나 전주 등에 다녀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영정거리. 길 끄트머리쯤에 강경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안내판 캡처)
 일제강점기 영정거리. 길 끄트머리쯤에 강경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안내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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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자전차점 으뜸 단골은 영정(榮町)파출소 앞 농방(가구) 골목 입구에 있던 '강경옥'이었다 한다. 강경옥은 시내에서 맛이 좋기로 소문난 냉면집으로 끼니때가 되면 정신없이 바빴는데, 자전거가 고가(高價)여서 구매는 못하고 대여해서 사용했다 한다.

강경옥 외에도 부근의 소규모 방앗간과 쌀가게, 주조장(양조장) 등도 단골이었으며 쌀과 술은 손잡이 부분이 낮은 짐자전거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양조장은 나무로 만든 술통(한 말)을 짐칸에 4~5개씩 매달고 다녔는데 그런 배달방식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이종남 어른은 "자전거를 팔아 남기는 이익도 좋았지만, 수리를 해주거나 대여해주고 받는 수입도 짭짤했다"고 말했다. 시내도 대부분 비포장 자갈길이고 험해서 타이어 '펑크'가 자주 났고, 자전거가 지금처럼 튼튼하지 못해 고장이 잦았단다. 

일제강점기에도 자전거포는 허가를 받아야 개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고품을 취급하는 모든 업소는 경찰서에서 받은 허가증을 액자에 넣어 가게에 걸어놓고 신줏단지처럼 모셨다고. '고물상 허가제'는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지다가 1990년대 초 '신고제'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못하고 자전거포에 취직

전북자전차점 주인 이규철(맨 오른쪽)과 종업원들 모습.
 전북자전차점 주인 이규철(맨 오른쪽)과 종업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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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 오른쪽 하얀 양복 차림의 젊은이가 주인(이규철)으로 당시 나이는 22세. 사장님이어서 그런지 나이보다 한참 어른스러워 보인다. 종업원들 표정이 다양하고, 자세와 옷차림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 친구 결혼기념사진처럼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복에 국민복, 양복, 일본식 '당꼬바지'(탄광바지) 등 옷차림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머리가 모두 하이칼라여서 군산의 모더니스트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림새만 보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의류를 염색해서 입는 게 유행이던 1950년대 어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서울 태생인 이규철은 외아들로 어렸을 때 사촌 형제들을 따라 군산으로 내려온다. 옥구군 회현면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몇 년 살다가 사촌들은 모두 떠나고 어린 이규철만 군산에 남는다. 일본인 자전거포 주인 눈에 들었기 때문.

이규철은 보통학교(초등학교) 입학도 못하고 자전거포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자전거가 비싼데다, 자전거포 종업원이었던 엄복동(1892~1951)이 자전거경주 때마다 일본 선수를 제치고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어서 자전거 수리공도 사윗감으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종업원이 넷이나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전거 수리공, 부속 재생 및 도금(鍍金) 기술자, 거래처 주문 배달 등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상가건물 사들여... 그러나 33살 나이로 생을 마감

1944년 이전개업한 아라이자전차점. 이종남 어른이 건물을 개축해서 지금도 살고 있다.
 1944년 이전개업한 아라이자전차점. 이종남 어른이 건물을 개축해서 지금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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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도시 군산은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도로가 개통되면서 시가지도 더욱 확장되었다. 그중 명치정과 이어지는 '소화통'(중앙로 2가)은 최근까지 군산의 관문 노릇을 했다. 따라서 이규철이 운영하는 전북자전차점도 나날이 번창한다.

무학(無學)이었던 이규철은 바쁜 중에도 틈틈이 책을 가까이하면서 한학을 깨우쳤다.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군산의 중심지가 이동할 것을 예견하고 모아놓은 돈으로 중앙로 2가(소화통)에 자리한 상가건물(2층)을 사들인다. 

1944년에는 장미동에서 중앙로 2가로 이사하여 새로운 각오로 상호를 '아라이(アラヰ)자전차점'으로 내건다. 이듬해 해방이 되자 한국이 일본을 앞서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로 '조화(朝和)자전차점'으로 상호를 바꾼다. '朝'는 한국(朝鮮)을, '和'는 일본(昭和)을 뜻한다고.

"아버지는 종업원들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어지간한 부속은 재생해서 사용했어요. 녹슨 부속은 집에 시설을 갖춰놓고 도금을 했을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나셨죠. 타이어 구멍을 때울 때 쓰는 고무풀도 생고무를 사다가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배웠습니다. '신나'를 섞어 만드는 법을 지금도 기억하죠."

그러나 이규철은 그해(1945) 11월 30일 미군이 피운 모닥불이 일제가 묻어놓은 다량의 포탄에 점화되어 발생한 '경마장폭발사건' 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다 33살 나이로 순직한다.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저미는데, 이 모두 '식민지 아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북자전차점, #조화자전차점,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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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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