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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한 장면. (자료사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한 장면. (자료사진)
ⓒ <말죽거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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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주먹다짐이 가장 많은 때는 요즘 같은 3~4월이다. 특히 고등학교의 경우, 갓 입학해 서로 서먹서먹한 신입생들끼리의 다툼이 많은데, 대부분의 아이는 이른바 '서열'을 정하기 위한 통과 의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중학교 때 '껌 좀 씹고, 침 좀 뱉어봤다'는 아이들도 적어도 학년 초 한두 달 정도는 분위기를 탐색하며 자중하기 마련인데, 아이들도 교사들도 이때를 일컬어 '태풍전야의 고요'라고 표현한다.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이라도 '일진'들끼리는 익히 들어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서열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아 서로 견제하려는 눈빛이 자못 매섭다.

이때 서열 다툼에서 일단 밀려나면 고등학교 3년간이 괴롭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안다. 중학교 때 익히 경험해 온 바다. 밀리면 순식간에 동급생들 사이에서 '찌질이'로 낙인찍히게 돼, 자칫 서열이 높은 아이들 곁에 맴돌며 '셔틀(아이들 사이에서 심부름을 일컫는 말)'을 다니는 신세로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찌질이'란 말은 요즘 중고등학생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듣기 싫어한다. 이 말은 최악의 별칭이며, 차라리 욕설이다. 쓰임새는 참으로 다양하다. 예전 같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부모님께 기대는 '마마보이'를 비꼬는 말이었는데, 그러나 요즘은 주로 동급생에게 맞아도 아무 소리 못 하고, '맞장 뜨자'는 말에 뒷걸음질치는 경우에 주로 쓰인다.

이때를 일컬어 '태풍전야의 고요'라고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급우들 간의 문제를 담임교사에게 고자질해도, 다른 많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다거나 인터넷 게임 등에 둔감해도, 그리고 유행하는 또래의 옷차림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어김없이 '찌질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다. 곧, 말의 쓰임새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다. 엊그제 학교에서 동급생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었다. 늘 그렇듯 사소한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싸움이 거칠어지다 보면, 처음 시비를 거는 아이나, 그것을 되받아치는 아이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절대 밀려서는 안 되는 자존심을 건 한판 싸움이 되고 만다. 특히 다른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두 아이를 따로 불러 자술서를 쓰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싸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아이의 자술서 내용은 서로 달랐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 골라내 중언부언 장황하게 썼다. 이러한 경우,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곤란하다. 결국 싸움을 말렸거나 곁에서 지켜본 아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증언은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이 폭력에 얼마나 둔감하며, 그것에 길들여진 채 심지어 친구들의 싸움을 '즐기고' 있는지를 깨닫는 계기이기도 하다. 마치 링 밖의 구경꾼으로서 싸움을 관람하고 제대로 싸우라며 파이팅을 외치는 격이다. 개중에는 평가와 전망까지 덧붙이는 '얄궂은' 아이들도 있다.

"얼굴에 제대로 한 방이 들어갔어요. 그걸로 끝났죠. 정신을 잃고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코피가 흘렀고, 주변 친구들이 달려들어 말리는 바람에 싸움이 싱겁게 끝나버렸어요."
"'맞장 뜨자'며 시비를 먼저 걸고도 주먹 한 번 뻗어보지 못하고 된통 얻어맞았으니, 녀석 스타일이 완전히 구겨진 거죠."
"저 같으면 가만 못 있죠. 잠자코 가만있다간 자칫 아이들로부터 '찌질이'라며 놀림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학교생활 끝이거든요."

이런 서슬퍼런 이야기들을 교사가 들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얻어맞은 아이가 들었다면 와신상담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붙어보라는 '권유'로 받아들였을 것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유야 어떻든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는 억울함보다 친구들로부터 받게 될 조롱이 그 아이에겐 더 큰 고통이라는 거다. 역시나 전화기 속 두 아이의 부모들은 당신의 자녀 두둔하기 바쁘다. 중학교 때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는 둥, 어릴 적부터 부모의 속 한 번 썩히지 않은 심성 고운 아이라는 둥, 싸움 한 번 해보지 않은 아이가 오죽했으면 주먹질을 했겠냐는 둥,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자초지종과 대강의 경위를 설명할라치면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심지어는 왜 상대방을 두둔하느냐며 다짜고짜 따져 묻거나, 엉뚱하게 학생부장 교육경력이 몇 년인가를 캐묻는 경우도 있다. 두 아이의 자술서와 여러 주변 친구들의 객관적인 증언을 대조하며 파악한 것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당황한 부모들의 흥분된 반응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교사로서 정작 안타까운 건 따로 있다. 부모들이 요즘 아이들의 학교 내 폭력 실태를 외면하고 있다는 거다. 학교가 무능하다고 더 기대할 것 없다고 혹평하면서도 당신 자녀들의 학교생활이 얼마나 폭력적인가에 대해서는 애써 눈 감고 있다. 친구들 간의 욕설이 친근감을 표시하는 도구이며, '서열 정하기'가 학년 초 연례행사라는 걸 그들은 과연 모르는 걸까.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가 폭력에 연루되면 십중팔구 다짜고짜 상대방에게 탓을 돌리다가 여의치 않으면 두루뭉수리 학교 교육에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황당하고도 억울하지만 학교는 대놓고 흥분한 부모들을 나무라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부모와 학교가 책임을 나눠지는 게 맞다며 간청하는 정도가 최선이다. 사실 수업시간 등 일과 중에 아이들을 만나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자존감이 부족하다. '찌질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하며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인정받기를 바라는 건 그래서다. 어릴 적부터 경쟁에 익숙해져 이웃에 사는 또래들은 물론, 집안에서조차 형제들과 끊임없이 비교되며 자라온 탓에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는 의식이 희박하다.

문제아로 찍힌다 해도 또래에게 존재감 과시해야


부족한 자존감을 메우는 건 또래 아이들 내의 '존재감'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욕설을 입에 달고 산다. 이 부분에서 가정에서의 모습과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생활 모습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 심지어 교사들 앞에서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던 '범생이'들조차 아이들 앞에선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욕설을 쏟아내곤 한다. 아이들은 비록 교사들에게 사고뭉치,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해도 또래 아이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했다면 '남는 장사'로 여긴다. 마치 군대의 내무반 생활의 그것처럼 간부들에게 아무리 잘 보여 봐야 늘 함께 생활하는 고참병에게 찍히면 군 생활 자체가 꼬이는 것과 같은 논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10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또래들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아 분을 못 참는 아이는 지금 보복을 다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고, 다툼을 지켜본 주변 친구들의 얕잡아보는 듯한 눈빛도 찝찝한 탓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의 선택지는 몇 없다. 잔뜩 흥분한 부모에 기대어 때린 얘를 벌주자니 다른 아이들로부터 '찌질하다'고 놀림 받을 것 같고, 교칙대로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자니 자신에게도 잘못이 적지 않아 걱정된다는 눈치다. 그렇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며 맞서자니 사건이 일파만파 커져버릴 것 같아 두려우니,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야 양측 부모들끼리 합의하도록 종용하는 것이 급선무지만, 어떻든 합의했다고 해도 아이들 다툼이 끝난 건 아니다. 부모들이 당신의 자녀가 아닌 상대 아이의 편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하지 않는 한, 합의 과정에서의 앙금은 아이들 사이의 여전한 갈등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치료비와 합의금을 치렀다며 당신들 두 자녀의 다툼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는 연락을 부모들로부터 받았다. 현실적으로 학교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학교도, 부모도, 무조건 합의만 외칠 뿐, 자존감이 부족한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또 감정 조절에 미숙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학교에선 또 그렇게 '태풍전야의 고요'가 지속되고 있다.


태그:#학교폭력, #학생부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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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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