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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송홧가루 날리는 5월 바람 부는 어느 날, 한 소설가가 죽었다. 그는 교사였고 우리들의 친구였다. 아무도 죽음의 원인을 몰랐다. <마적>이라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대하소설 14권과 또 다른 장편과 단편 작품 여럿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소진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 년 내내 어느 한 순간 쉬지 않고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소설을 써갔다.

그는 세상을 살다 간 자들이 남기고 간 가슴을 모아 귀 기울여 소설을 썼기에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책 속으로 심장이 옮겨져 버린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휘어잡는 묘한 분위기의 글을 써나간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존재가 아니다. 너무 깊이 들어간 작품 속 인물들과 당시 세상이 그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왠지 낯설었을 것이다. 그는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 같다.

<시골무사 이성계> 표지
 <시골무사 이성계> 표지
ⓒ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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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 소설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서권의 장편소설 <시골무사 이성계>가 다산책방에서 나왔다. 대하소설 <마적> 14권을 세상에 숨겨놓고 떠난 그의 존재를 알리기로 한 친구와 지인들의 정성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택배로 배달된 책을 펼치면서 여기저기 한 구절씩 활자를 살펴보다가 숨이 막혀 도로 책장을 덮었다. 친구는 거기 있었다. 그의 숨이 벌떡이고 있었다. 그의 문장에서는 울컥하게 만드는 한이 느껴진다. 가장 치열한 전투 장면에서도 생의 활기를 그리는 정점에서도 불어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게 한다.

대저 장쾌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묘사와 서술 속에서도 시인과 같은 감성을 미세하게 살리며 독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필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하필이면 왜 이성계일까. 한 나라를 거꾸러뜨리고 새 나라를 일으킨 무장이자 시조로서 교과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일면 식상할 수도 있지만, 소설가 서권은 <시골무사 이성계>를 통해 한때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관통하는 고뇌는 결코 욕망을 품은 자만의 거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이성계라는 인물은 고려 말 조선 초기 우리 역사의 한 인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변혁의 인물이요, 우리 마음속에 모두가 품어야 할 열망을 하늘에 띄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맞고 있는 시대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마저도 여말선초에 걸쳐 있는지 돌아보고 변혁을 꿈꾸라는 소설가의 계시가 오늘도 하늘로 오르는 달이다.

눈부신 창작열을 불태우고 소진해버린 치열한 작가 서 권
▲ 소설가 서 권 눈부신 창작열을 불태우고 소진해버린 치열한 작가 서 권
ⓒ 임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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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투 장면보다 더 스펙터클해서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가 마감되면 더 전쟁을 연장하고 싶은 마력이 작품 속에 있다. 인물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을 듣다 보면 그 자리에 끼어들어 누구 편을 들거나 나의 주장을 펼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상상력을 초월한 대미의 장면에서는 눈을 씻게 하는 미학적 아름다움과 함께 싸움터에 끌어들여 독자를 몰고 온 작가의 전략에 찬사를 보내게 한다.  

눈부신 창작열을 불태우고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하늘로 올라가버린 한 소설가의 혼이 머물렀던 지리산 근방에 노란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마침 다음 주는 그곳에 가서 사흘 정도 머물 일이 있어 그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어보려 한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그가 숨겨놓은 대하소설 <마적>을 끌어낼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 제위의 일독을 간절하게 권한다.


작가의 눈 2012년 17호

전북작가회의 지음, 작가(2012)


태그:#시골무사, #서권,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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