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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장난이나 그럴듯한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날'이 4월 1일 만우절입니다. 정직한 이들이 하루 정도는 재미삼아 거짓말해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크고 무거운 거짓과 거짓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그 거짓의 세계를 들여다봤습니다. [편집자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기거나 던져야 했던 불행한 시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불행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기거나 던져야 했던 불행한 시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불행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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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학생이었던 1992년, 나는 직업적인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택한 분야는 '인권 운동'이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1970~80년대가 '노동운동'이 대세였다면 87년 6월 항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대세는 분명 '통일운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권 운동'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90년 3월,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료의 억울한 의문사를 밝히고자 싸우던 중 겪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그때, 누구라도 좋으니 절박한 호소를 들어줄 누군가가 정말 그리웠다.

그러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영장이 발부된 1991년 3월, 수갑과 포승줄로 묶인 채 호송되는 버스 안에서 '직업적인 인권운동가'가 되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했다. 나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간절함이 이후 인권운동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다.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란?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20)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에 처음 참여한 새내기였던 강씨를 경찰이 쇠파이프로 때려죽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이에 따른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이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시위는 확산 일로를 거듭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의 분명한 위기였다.

그러던 1991년 5월 8일 아침, 한 재야 활동가가 정권 퇴진 요구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었다. 그런데 경찰·검찰·안기부(현 국정원) 등으로 구성된 소위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는 잇따른 분신 사건 배후에 이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분신 배후설'을 제기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건이 이른바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김기설에게 유서를 대신 써 준 사람을 검거한다면서 여러 명을 거론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서 대필범으로 '정해진' 이가 김기설의 동료였던 강기훈씨였다.

그것은 진실과는 상관없었다. 정권의 위기 탈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유서 대필범'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매일 매일 조중동이 써대니 처음엔 믿지 않던 국민도 이내 혼란으로 빠졌다. 진짠가? 아닌가? 마치 지금 천안함의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현상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권운동가의 숙명은 '세상의 거짓'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 활동한 단체가 '유서대필사건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였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나는 그곳에서 간사로 일했다.
결론적으로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이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의 발표였다. 진실은 역시 단순했다.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가 맞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범'이라는 '거짓말'이 공식적인 거짓으로 밝혀지기까지 16년의 허망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강씨는 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처럼 내가 해온 인권 운동은 '거짓과의 싸움'이었다. 대부분 경찰·검찰 등 국가 권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라든가 전남 완도 존속살인 여 무기수 사건이 그랬다.

또한, 서울 모 여고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다가 청부 살해된 이 역시 아픈 상처로 남아 있고 살인범으로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어떤 청년의 불행한 사건 역시 내가 관여한 사건 중 하나였다.

억울한 죽음, 신호수를 아시나요?

1986년 6월 11일, 경찰에게 불법 연행된 신호수씨는 8일후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숨진 형태를 재현해보라고 하자 결국 해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입증하지 못하는 거짓말이었다.
 1986년 6월 11일, 경찰에게 불법 연행된 신호수씨는 8일후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숨진 형태를 재현해보라고 하자 결국 해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입증하지 못하는 거짓말이었다.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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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1994년 내가 두 번째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만난 분들의 사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던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야만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김성수,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김귀정 등등등. 낯익은 이름과 얼굴들 속에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이는 낯선 이름 '신호수'씨였다. 사건 당시 23살(1963년생)이었던 신씨가 불행한 사건에 연루된 것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86년이었다.

1986년 6월 11일, 신호수는 직장인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에게 체포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공안사건과 상관없는 그가 이같은 혐의로 체포된 이유는 자신의 자취방 장판 밑에 숨겨둔 북한 삐라 34장 때문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1985년 전남 장흥에서 방위 복무를 했던 신호수는 소집 해제 후 이사를 했다. 그런데 방 주인이 방바닥에 깔려있던 삐라를 발견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신호수는 왜 이처럼 많은 삐라를 보관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이는 군 포상휴가를 받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신호수가 복무하던 부대에서는 상당량의 삐라를 가져오면 포상 휴가를 줘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의 삐라 관련 의혹은 해소되었다. 하지만 신호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신호수의 사망이었다.

경찰에 연행된 지 8일이 지난 6월 19일, 신호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고향인 여수 돌산읍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호수의 사망 경위였다.

당시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 신호수의 사체를 처음 목격한 유아무개씨가 2001년 의문사위에 출석하여 진술한 내용이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경찰의 뻔한 거짓말이 밝혀지기까지 23년 세월 흘러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싸워온 시간 동안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현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도대체 자살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하겠냐"는 항변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기자는 말하지 못했다.
▲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님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싸워온 시간 동안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현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도대체 자살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하겠냐"는 항변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기자는 말하지 못했다.
ⓒ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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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찰은 왜 신호수의 자살 경로를 재현하지 못했을까. 애초부터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주장처럼 신호수가 자살하려면 약 2.5미터나 되는 동굴의 천장까지 올라가 그 틈에 옷의 뭉치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제3의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또는 사다리 등 도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실패는 당연했다.

그런데 불가능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신호수의 자세였다. 사체 발견 당시 신호수는 묘하게도 양팔과 몸통이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가정한다면 신호수는 먼저 자신의 양팔과 몸통을 허리띠로 묶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의 키인 165cm보다 높은 250cm 위치에 형태상 접근이 불가능한 바위까지 올라가서 목을 매야 자살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2중, 3중으로 불가능한 조건이었으니 당시 경찰의 '이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 입증에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의 끝은 당연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을 향했다. 물론 경찰은 강력 부인했다. 특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 차아무개씨는 "확인해보니 포상 휴가를 위해 삐라를 모아둔 것으로 밝혀져 3시간 만에 훈방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차씨의 주장만 있을 뿐 석방된 신호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진실위 조사 과정에서 차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진술이 잇따랐다. 차씨와 같이 근무했던 그 당시 경찰관 4명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신호수가 연행된 후 적어도 3일 이상 서부경찰서에 있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즉, 3시간 만에 신호수를 석방했다는 차씨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한 이유가 삐라 신고를 받고 착수한 통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하기 9개월 전부터 이른바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이 사건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놀랍게도 신호수의 혐의는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호수에게 해명 몇 마디 듣고 경찰이 석방했다니 믿을 수 있을까.

이 뻔한 경찰의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기까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9년 11월 10일, 진실위는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씨 등이 '장흥 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판단한다"며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거짓과 싸우는 숙명, '인권운동가'

여기서 끝났어야 할 신호수의 불행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2011년 8월 29일, 진실위를 통해 밝혀진 결과를 가지고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신호수의 위자료 청구는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위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의 거짓말에 대한민국 법원이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어 준 '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일흔이 넘은 아버지 신정학씨는 법정을 나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인권운동가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수에게 부당한 처우를 강요할 때마다 즐겨 동원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이같은 논리로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국민을 속인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가 그렇고 4대강 사업, 또한 김훈 중위 사건으로 대표되는 군 의문사를 비롯하여 남북 관계에서도 거짓말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요즘 '애매하면 북한측 소행'이라는 우스갯말이 세인들 속에 떠도는 것 아닐까.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이러한 거짓과 싸울 것이다. 이것이 인권운동가인 내가 가진 '올바른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에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으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진실은 반드시 승리함을 나는 역사 속에서 확인했다. 그 길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태그:#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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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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