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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드디어 전국적 단일화가 이뤄졌다. 2010년 지방선거를 비롯해 재·보궐선거에서 야권단일화가 이뤄진 사례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권한을 나누기 쉽지 않은 총선에서 전면적 단일화가 이뤄진 것은 유례 없는 일이다.

이로써 이번 총선은 명확하게 새누리당 대 야권의 1대 1 구도가 형성되게 됐다. 이런 구도는 1992년 대선에서 전국연합과 정책연합을 이룬 당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와 여당인 민자당으로 출마한 김영삼 후보 간의 맞대결 이후 20년 만이다. 20년 전의 '반민자당' 구호가 이제 '반MB, 반새누리당' 구호로 재현된 것이다.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을 보여준 이명박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실정들이 하나 둘 폭로되면서 2012년만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그토록 외쳐왔던 'MB정부 심판'의 구호는 전면적 야권 단일화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야권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마냥 즐거워 할 수만은 없다. 단일화에도 패배할 수 있다는 조바심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야권이 승리하게 될 경우 '성공 뒤의 위기'가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증오의 정치가 부르는 성공 뒤의 위기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지난10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 '4·11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야권연대 합의문 서명식'에서 각자 서명한 합의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지난10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 '4·11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야권연대 합의문 서명식'에서 각자 서명한 합의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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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는 '증오의 정치'가 지배해 왔다. 87년 6월항쟁 이후, 단 한 번도 새로운 비전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 각축이 증오의 정치 대립을 넘어선 역사가 없다. 특히 대립하는 두 거대 정당의 선거 전략은 항상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최대한 끌어내 그 효과를 전유하는 것이었다.

가깝게는 2007년 대선에서 반노무현 운동을 주도한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이 그랬고, 더 거슬러 2002년과 1997년 대선에서 '반창연대'라 이름 붙여진 민주당의 선거 전략이 그랬다. 물론 20년 전의 '반민자당'전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은 반MB연대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증오정치가 과거의 경로를 좇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비극은 바로 그 증오심이 복수에 성공한 순간, 그 즉시 새로운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증오의 정치는 증오의 대상이 사라진 후에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오직 중요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에 머문다.

학계와 몇몇 언론계가 '정책이 실종된 선거'라는 한탄을 쏟아낼 정도로 유권자에게 공약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한국 정치의 기본 구도 자체가 미래적 담론을 둘러싼 각축이 아니라 과거를 심판하는 증오의 복수심 간의 대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증오의 정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나의 대상에게만 귀속시키기 때문에 내부에 도사리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반MB진영 내부에 존재하는 MB의 모습이 X맨이라는 조롱 속에서도 쉽게 망각되어 버리듯, 맹목적인 증오심은 많은 것을 은폐시킨다.

증오의 성공 뒤에 예상되는 두 가지 경로

이제 겨우 야권이 단일화를 이뤘고, 선거도 한참 남았는데 재수 없게 무슨 설레발이냐고? 맞다. 김칫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거승리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기보다는 오히려 성공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성공 이전에 성공 이후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선거 패배보다 더 심각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만약 총선에서 야권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치자. 더 나아가 연말 대선에서도 야권이 승리했다고 가정 해보자. 증오의 정치가 성공한 이후 한국 정치의 진행방향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그려볼 수 있다.

첫 번째 경로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악정을 심판한 것으로 종결하면서 적절한 화해와 타협을 통해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는 이명박 정부가 후퇴시킨 민주주의를 원상복귀 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적절한 양보를 통해 정권을 잃은 이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보수층까지도 동의할 수 있는 무난한 개혁정책 실현을 도모할 수도 있다.

다름 아닌 2005년부터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전략이다. 그 결과 또한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점진적 개혁의 목표는 관료사회에 굳건히 틀어박힌 기득권 세력의 영향력 속에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제도정치권에서 시민사회로 내쳐진 이들은 '시민의 목소리'를 가장 한 채 민주주의를 외치며 개혁조치에 저항해 나갈 것이다.

반면 시민사회의 역량은 총선과 대선 이후 대규모 인원이 정치권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특혜를 받아온 시장권력은 채찍과 당근을 섞어가며 정부인사 유혹에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이 경로는 우리가 총·대선 이후 기대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부 등장 이전의 어떤 수준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기껏해야 그것은 2004년 총선 직후의 민주주의일 뿐, 새로운 체제는 아니다.

두 번째 경로는 대중적 힘에 기반을 둔 강력한 포퓰리즘으로 진보·개혁적 정책을 밀어 붙이는 형태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비롯해 남미 진보정권들처럼, 이들이 추구하는 변화의 폭은 정책 수준을 넘어선 체제 수준의 변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87년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2013년 체제를 도모하는 것이다.

남미 진보정권들이 사회·경제적 권력이 미약했음에도 효과적으로 급진적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을 획득하기 이전에 정권획득 이후의 프로그램이 존재했고, 선거기간을 통해 이를 대중과 합의해 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공 이전에 성공 이후의 전략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고 성공전략 자체가 이것을 대중과 합의해 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남미의 급진적 경로는 실현 불가능했다.

야권 공동정책합의문, 체제 내적 수준에 머물러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인 비대위원.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인 비대위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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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인 새로운 국가건설의 급진적 비전을 가진 세력은 상황에 따라 점진적인 개혁 방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현 체제 내부에서 타협과 양보에만 익숙한 세력은 급진적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2012년을 기대했던 것이 단순한 증오와 복수의 성공이 아니라 지금과는 체제적으로 다른, 새로운 국가모델로의 진전이라면, 이제까지 야권이 보여준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야권 단일화의 양대 축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지난 3월 10일 공동정책합의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했지만, 모두 87년 체제의 틀 속에서 맴도는 것일 뿐 이것을 넘어서려는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미FTA나 남북문제 등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하면 지금의 질서와 체제의 수호자임을 자임한 새누리당 역시도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새누리당이 거리 곳곳에 설치해 놓은 현수막에는 그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강렬한 종북좌파적 붉은 바탕 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 국민이 바라던 변화 새누리당이 만들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변화를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메시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색깔을 버리고 과거의 이미지와 정 반대의 색깔도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혁신의 주체이며, 현 체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세력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라면 염치 따윈 아랑곳 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반면 야권은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폭은 협소하다. 여전히 제주 강정마을의 군사기지와 한미FTA에 책임이 있음에도 무엇이 변했는지,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마냥 듣기 좋은 정책 몇 개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 연대의 대상에게까지 자행하는 철지난 색깔론은 도대체 누가 변화의 주체이고 대상인지조차 회의하게 만든다.

야권, 총선 직후 체제수준의 담론 준비해야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당장 무슨 비전을 제시하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요구다.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실 가능한 정책'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체제 운운하는 순간 '허황된 공약'이라는 맹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체제 수준의 담론을 제기하자는 것이 순진한 발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이후에도 체제 수준의 담론을 제기하고 신국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의 확산은 속도를 낼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반MB와 반새누리당 이외의 별다른 쟁점이 형성되지 못하고 새로운 국가비전을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선거운동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활동해온 역동적 시민과 평범한 보통 시민 간의 괴리감이 넓어지고 있는 듯한 징후도 보인다.

총선 이후에는 체제수준의 비전을 먼저 제시하는 세력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주도권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총선에서 역관계가 바뀐다면, 증오정치 만으로 대선까지 돌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12년의 대선은 다양한 수준의 개헌 논의를 비롯한 거대담론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예측이 시사하는 바는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가 '증오의 정치'가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둘러싼 '희망의 정치'가 각축하는 대선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87년체제의 쳇바퀴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대안체제의 모습 속에 투영시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증오의 정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를 희망의 정치로 전환시켜 내는 것은, 1차적으로는 정치권의 몫이다. 지금은 1대 1 선거구도를 만들어 구시대의 유산을 심판하는 것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총선 이후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국가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벌써부터'라도, '설레발'이라도, 야권 역시 총선 이후에 제기할 체제담론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단일화에 마냥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설령 현실정치세력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해도 그 임무는 시민사회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냥 사라져야 할 것은 분명 아니다. 증오의 정치로 인해 희망이 곧 실망으로, 열정이 곧 좌절로 거듭되어 왔던 한국 정치의 고질적 악순환을 끊는 임무를 정치권에만 맡겨 놓을 필요는 없다.

증오의 정치를 넘어선 그곳을 상상할 때, 일상에 파묻혀 잠시 식어버린 심장이라도 다시 뜨겁게 뛸 것이다.


태그:#단일화, #87년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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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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