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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나쁜 사람이다. 나를 가르쳐주시고 키워주신 선생님이 항상 마음에는 있었으나 사진관을 개업하고 먹고살 만하니 그제서야 생각나고 그리워짐은 무엇인가? 초등학교 5, 6학년 이태를 선생님께서 거의 키워주시다시피 하셨는데, 사연인즉 이렇다.

할아버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방앗간을 하셨다. 방앗간은 아주 오랜 옛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도 역시 '딸이 팔다리가 없어도 진사댁으로 시집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그런 방앗간집의 장손인 아버지가 농사짓기 싫다고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서 할아버지 품을 벗어난 뒤로 나의 비극은 시작이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괘씸죄'가 적용이 되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체의 지원이 없었다. '배고프면 내려오겠지'는 그냥 할머니 생각만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결국 몸뚱이 굴려 하는 힘든 일은 싫어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5, 6학년 동안 남들 모두 양은 도시락 까먹을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수도꼭지 입에 물고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수모를 당하고는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른을 갓 넘긴 선생님께서 속이 안 좋다 하시고는 가끔 도시락을 건네주곤 하셨다. 한참을 그렇게 하시더니 나중에는 아예 내 도시락까지 싸오시어 다른 친구들이 볼까 눈치를 보며 아침 일찍 내 가방에 넣어놓고는 하셨다.

선생님 덕분에 2년 동안을 배 곪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를 가고 나서도 일 년에 한두 번씩 선생님께서 일부러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 덕분에 맛있는 것도 얻어먹으며 선생님을 뵈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선생님과 연락이 끊겼다.

찔레꽃
▲ . 찔레꽃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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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선생님 도시락을 까먹으며 자란 제자가 선생님의 뜻대로 훌륭하게는 못 되었지만 결혼을 했고 가정을 꾸렸다. 사진관을 개업하고 먹고살 만하니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딸에게 선생님 얘기를 했더니, 딸이 교육부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선생님을 찾아보란다. 그랬더니 정년퇴임을 하시고 대구 어딘가에 계신단다.

다음 날 부랴부랴 소갈비에 근사한 와인에 바리바리 싸들고 대구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딸아이와 간신히 물어물어 선생님 댁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으나 맞아주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닌 자제분과 며느님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우선 앉으시죠, 먼 길 오셨는데 차부터 한 잔 하세요."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
"…."
"아버님께서는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습니다."

찔레꽃
▲ . 찔레꽃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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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님의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주저앉고 말았다. 한 시간을 엎어져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딸의 재촉으로 서울로 되돌아왔는데, 그 뒤로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졌고 느는 것은 눈물뿐이었다. 그 때문에 딸들에게 "그럴 거면 진즉에 좀 찾아뵙지, 이제 와서 안 계신 선생님 찾아 울고불고하면 어쩔 건데?"라며 한동안 핀잔을 들으며 살아야 했다.

일선의 선생님들께는 송구스러운 말씀이나 나의 학창시절을 통틀어 참으로 선생님다운 선생님은 오직 한 분, 그 선생님뿐이었고, 나머지 선생님께는 오로지 맞은 기억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를 육성회비 안 가져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뺨을 때렸고, 그러면 나는 코피가 벽에 튀도록 저만치 나가떨어지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니 학교 가는 게 뭔 재미가 있겠으며 공부가 뭔 재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선생님을 만났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는 둘째 치고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선생님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잠깐 <오마이뉴스> 블로그에서 만난 계성여고 송영호 선생님이 쓴 글을 일부 소개한다.

오마이뉴스 블로거이신 송영호 선생님.
▲ . 오마이뉴스 블로거이신 송영호 선생님.
ⓒ 송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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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7.(수)
학급에는 '정보·경제 도우미'가 있다. 학급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 하는 학생이다. 공동구매한 교재대금을 걷는 일을 하거나 교실 모니터를 이용해서 수업을 하는 선생님 시간에 모니터와 선생님 노트북을 연결해주는 일도 한다.

"정보·경제 도우미를 두 명 뽑아야 하는데 자원할 학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주희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선생님, 제가 할게요."
"(고3이 궂은일을 자원해서 하겠다는 것에 감동을 받아) 와~ 주희야, 고맙다. 나 같으면 자원해서 그런 일 안 할 거 같은데…. 내가 너에게 배워야겠다."

이 글을 쓰면서(오후 7시 45분 경) 주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송선생님이 학생에게 보낸 문자.
▲ . 송선생님이 학생에게 보낸 문자.
ⓒ 송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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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하지만 학창시절에 위의 송 선생님 같은 스승을 만났다면 내 인생은 180도 달라져 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가 아니고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선생님 말고는 내 눈에 선생다운 선생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40년 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촌지도 아예 내놓고 요구를 했고 그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학생의 부모는 학교에 불려 다니기 일쑤였다. 그리고는 다른 학부모 앞에서, 자식 앞에서 면박당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이제는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됐고 두 딸의 지난 학교생활을 돌이켜보면 세월이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대학을 졸업한 작은 딸은 지금도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떡볶이며 만두를 먹고 다니며, 스승이라기보다 친구처럼 언니처럼 지내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찔레꽃 선생님'. 나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의 선생님을 찔레꽃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담 밑에 피어난 찔레줄기의 껍질을 까서주면 연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나던 그 찔레꽃을 말함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런 분이셨다(오늘부터 나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의 송 선생님을 어렸을 적 나의 스승님을 대신해 찔레꽃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 그리운 찔레꽃 선생님,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내가 여행도 보내드리고 맛난 요리도 사드리고 했을 텐데. 선생님께 진 큰 빚을 어이하면 좋을까!


태그:#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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