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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강원도에 눈이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짐을 꾸렸습니다. 눈 때문에 차가 막히면 그냥 돌아올 각오로 말이죠. 사실 3월이면, 봄을 맞으러 남녘으로 가는 게 맞지만, 올해는 마지막 겨울 풍경을 가슴에 꼭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걱정은 기우 일뿐, 강원도에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추적추적 봄비가 말이죠.

고성에 도착하면서 비는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차는 맘대로 와이퍼를 신나게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동으로 비가 내리는 속도에 맞춰 와이퍼가 움직이나 봅니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와이퍼가 이리저리 제 맘대로 속도 조절을 하는 게 재밌나 봅니다. 하지만, 운전하던 아내는 뭔가를 조정하더니, 정신없다며 자동 조정 기능을 꺼버렸습니다. 재밌는 볼거리가 없어진 아이는, 이내 검은 빛의 바다를 응시합니다. 오늘은 꼭 태풍이 오기 전의 바다 같습니다. 하늘도 검고, 바다도 검고, 산도들도 다 검은 색입니다.

검은 빛의 호수는 지금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요?
 검은 빛의 호수는 지금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요?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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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에 접어들 쯤, 하늘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아내는 이런 날이면, 울릉도에 보름동안 갇혀 지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진절머리가 난다고 합니다. 그때 바다와 파도는 자신을 집어 삼킬 듯 크고 무서웠다고 말이죠.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배가 뜨질 못하니, 그렇게 보름을 울릉도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화진포는 그 둘레만 16Km에 달하는 동해안 최대의 호수입니다.
 화진포는 그 둘레만 16Km에 달하는 동해안 최대의 호수입니다.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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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별장, 이기붕 별장, 이승만 별장 등의 이정표를 무시하고, 호수를 따라 돌았습니다. 화진포는 그 둘레가 무려 16km에 달하는 동해안에서 제일 큰 호수라고 하네요. 이곳도 이제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물이 봄비에 조금씩 녹고 있으니까요.

물과 얼음 경계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
 물과 얼음 경계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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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이 있는 곳 근처에 도착 했습니다. 비만 안 내리면, 당장이라고 바닷가에 서보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겠네요. 할 수 없이 비가와도 상관이 없는 해양박물관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화진포해양박물관'은 사실, 저희 가족이 여러 번 왔던 곳입니다. 무엇보다 아내가 참 이곳을 좋아하지요. 둘째 아이에게 여러 가지 예쁜 물고기를 보여줄 겸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박물관 옥상에 올라가면, 해수욕장의 모습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
 박물관 옥상에 올라가면, 해수욕장의 모습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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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모습도 보이고요.
 호수의 모습도 보이고요.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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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이 감도는 화진포의 모습에서 전 여러 가지 상념에 휩싸였습니다. 어쩐지 이곳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생각은 한 것은 바로 첫째 아이(13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학년 말 방학, 일명 봄 방학을 학수고대하던 아이가 방학 시기에 딱 맞춰서 발가락을 다쳤습니다. 정확히는 새끼발가락 뒤쪽 뼈였는데,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정형외과에 갔더니 골절이 예상된다고 하더군요. 뼈가 확실히 부러지거나 금 간 것은 아닌데, 조금 부어올랐답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골절에 준한 치료를 해야 한다더군요. 결국 깁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호수의 모습을 한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비를 맞으며, 호수의 모습을 한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 방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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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이가 발에 깁스를 한 후, 전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아이에게 시켰었는지 말이죠. 둘째(18개월)를 돌보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저는 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일들을 그동안 잘도 시켰습니다.

기저귀 가져와라! 손수건 가져와라! 물수건 가져와라! 이거 치워라! 저거 치워라! 동생과 놀아줘라! 가방 좀 들어라! 차 문 좀 열어라! 닫아라!

그런데, 아이가 다친 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으니, 이런 잔심부름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젠 반대로 아이가 해달라는 것들을 제가 해줘야했죠. 물 가져다주기, 일어날 때 목발 가져다주기, 화장실 데려다 주기, 휴대전화기 충전해주기, 게임기 충전해주기 등등. 물론 저야 아침에 회사로 출근해버리면 모든 뒷바라지는 아내 몫이 되지요. 아내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뻔합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아! 내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아이에게 시키지 않아도, 둘째 아이를 보면서도 충분히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미안한 마음에 이젠 꼭 필요할 때만 아니면, 아이를 부르지 않으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행히도, 아이는 깁스를 풀었습니다. 그동안 밖에 나가 놀지 못하던 아이도 그렇지만, 저희 부부에게도 좋은 일이죠. 첫째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저희 부부를 도와 육아에 가담했는지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아빠! 비 맞고 뭐해?"

건물 안에서 아이가 저를 부릅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외투가 젖는 것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그동안 미안했다. 아들아!' 저는 속으로 되뇌며 아이에게 다가 갔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화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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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 혹은 여행지의 추억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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