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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이의 면회일자가 잡혔다. 5주간의 군인화과정 교육을 마치고 3주간의 공수교육 마지막 주에 가족들을 초청해 시범훈련도 하고 면회시간도 준다는 것이다. 아내는 면회 2-3일 전부터 아이가 평소에 좋아하는 피자와 통닭, 초콜릿 등을 준비한다고 수선을 떨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큰 아이가 군대가 무슨 벼슬이냐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휴가까지 얻어 아내와 함께 음식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른 아침에 면회길에 올랐다. 아이가 있는 부대까지는 3시간이 넘게 걸릴 터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제까지 봄날이던 날씨가 무슨 심술인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를 뿌렸다. 군부대 교육단까지 수도권에 존치시켜야 할까 하는 우울한 생각을 하며 카스테레오 음악에 마음을 묻고 말없이 차를 몰았다.

내가 31년 전에 청춘을 불태우던 그 부대에 아이가 입대하여 훈련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도 연병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땀이 범벅이 되어 함성을 지르며 뛰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아이가 어느새 입대를 해 면회를 가게 되다니 세월의 덧없음이 뼈 속까지 스며든다. 군대생활은 많이 좋아지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다지만, 아이와 몇 번의 전화통화에서 먹고 싶은 것이 많다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춥고 배고프고 졸린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지난해 대학에 진학한 작은 아이가 처음에는 대학생활을 즐거워하고 재미를 붙이는가 싶더니 날이 갈수록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업을 소홀히 하고 수업을 빼먹는 날이 많아졌다. 애초에 가고자하던 학과에 가질 못하고 성적에 맞춰 밀어 넣다보니 생긴 결과였다. 더욱이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대학의 공과계열이라 등록금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데도 허구한 날 수업을 빼먹고 밤을 세워 오락게임이나 하고 있으니 부모마음에 천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아이를 불러 그렇게 시간만 낭비하지 말고 군대에나 가거라. 군대에 다녀와서 진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일렀다. 그리고 나태하고 무기력한 아이의 정신상태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기왕에 군대에 가려면 해병대나 특전사 쪽의 특수부대를 지원하라고 권했다. 아이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특전사에 지원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국군통합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체력검사를 통과한 후 필기시험을 치르는 등 일련의 과정들을 일사처리로 진행시켜 도망가듯이 교육단에 훈련병으로 입대한 것이 지난 1월 초순이었다.

매사가 어린애 같고 생각없이 세월을 허비하는 것 같아 한겨울에 내쫓다시피 군대에 보내놓고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대한의 남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할 과정이라며 심신을 단련시켜 돌아오라고 보냈지만, 눈보라 속에서 혹한의 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고생하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입대한지 한달이 넘어서 보내온 편지에는 군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원래 운동을 좋아하고 근육질이라 힘든 훈련과정에서도 별 어려움은 없는듯했다. 날마다 보내는 아내의 편지와 기도가 큰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머무는 교육단에 도착하니 정오가 넘었다. 경칩에 내리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오스스 한기를 느끼게 했다. 아이가 입대하던 날 이곳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갈 때 흩날리던 눈에 마음이 참 많이 시렸었는데, 오늘은 반갑지 않은 비가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비 때문에 준비했던 행사는 취소되고 간단한 동영상 시청과 장비관람으로 대체했다.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식당으로 이동해보니 가족들과 훈련병들이 얽혀 난리가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벌써 음식을 굽고 끊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수라장에서 아이를 찾느라 헤매고 있는데 뒤에서 먼저 아이가 우릴 발견하고 달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져 제대로 반기지도 못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더 건강해지고 활달해져 보기에 좋았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쉬임없이 떠들어대는 아이가 여전히 어린애 같은데 벌써 군인이 되었단다. 31년 전의 내모습도 저러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면회장에서 가족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훈련병들이 전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 아이와 함께한 분대원들 면회장에서 가족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훈련병들이 전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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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생의 황금기 20대의 초입에서 꿈과 사랑과 학업을 유예시켜 둔 채 세상과의 유폐된 공간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새로운 인생길을 모색해 나가야 할 아이를 생각하면 삶이 한없이 고단하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언젠가는 군대생활 동안 쌓은 훈련과 인내의 시간이 인생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울 그날을 위해 농부가 밭을 갈듯이 서두르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터전을 가꿔나가길 바란다.

그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대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를 들라.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김난도 저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면회시간이 다 되어 밖으로 나오니 빗발이 더 거칠게 쏟아졌다. 우렁찬 목소리로 거수경례를 한 후 빗속을 뚫고 병사(兵舍)로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한없이 듬직하고 자랑스러웠다.


태그:#군대, #특전사, #훈련병, #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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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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