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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댁 어딨어? 나하고 같이 좀 가. 손 하나 비면 이것도 좀 들어주고. 아이! 같이 가잔 말이시."

 

아직 해가 솟으려면 한참 멀었다. 하지만 벌교역이 왁시글덕시글하다. 무궁화호 열차가 도착하자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나온다. 저마다 손엔 큼지막한 보따리 한두 개씩 들고 있다. 할머니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디론가 총총걸음을 옮긴다.

 

할머니들이 향한 곳은 벌교역 앞 도로. 노상에서 할머니들은 들고 온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헤친다. 능숙한 솜씨다. 보따리에서는 말린 고사리와 취나물, 그리고 꼬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깡통 하나 구해다가 불 좀 피우세. 어! 추워. 무자게 춥네. 마수걸이도 하기 전에 얼어 죽게 생겼네."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장이 서는 날이다. 벌교오일장은 매 4일과 9일 선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질펀한 삶이 펼쳐지는 날이다. 장은 꼭두새벽부터 열린다. 벌교역 삼거리와 부용교 사이 노상은 할머니들 차지가 됐다.

 

평소에도 날마다 장이 서는 곳이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엔 벌교세무서 옆 골목까지 장이 선다. 일제강점기 땐 이른바 '본정통'으로 불리던 곳이다.

 

한편에서 흥정이 시작됐다. 생선 한 마리를 두고 제법 큰소리가 오간다. 흥정이 끝났을까. 할머니가 허리춤을 들추더니 꼬깃꼬깃 넣어둔 5000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장터에서만 볼 수 있는 살가운 정경이다. 

 

벌교장은 '어시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만큼 어물전이 많다. 장을 보러 나온 이들 장바구니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갯것이다. 비단결 같은 매생이를 비롯 새 부리를 닮은 새조개, 굴, 바지락, 감태, 꼬막 등이 어물전마다 그득하다.

 

다른 지역에선 보기 어려운 대갱이도 한쪽을 차지한다. 모두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득량만과 여자만 갯벌에서 잡은 것들이다.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우는 해산물이다.

 

이 가운데 벌교 참꼬막은 으뜸이다. 쫄깃쫄깃하고 짭조름하면서 알큰하고 배릿한 맛이 일품이다. '벌교하면 꼬막, 꼬막하면 벌교'란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강호동과 이승기, 이수근 등 <1박 2일> 팀도 체험하며 감탄했던 꼬막이다.

 

"벌교 꼬막이 최고지라. 반찬은 말할 것도 없고. 술안주에도 좋아라. 여그 사람들이 오죽하면 감기 석 달에 입맛은 소태 같아도 꼬막 맛은 그대로라고 하것소."

 

30년째 장터를 연줄 삼아 살아가는 박만표씨의 자랑이다. 벌교장의 명물은 꼬막만이 아니다. 지역 특산물로 부상하고 있는 참다래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벌교 참다래는 과육이 실하고 맛이 부드럽다. 향도 좋다. 바닷바람과 좋은 땅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벌교는 국도 2호선과 경전선이 가로지른다. 예부터 보성과 순천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였다. 고흥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려면 반드시 밟아야 하는 땅이었다. 벌교철교 아래 포구에서도 섬마을로 오갈 수 있었다. 덕분에 장날이면 고흥, 낙안, 순천, 보성 등지에서도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지금도 부근에서 제일 큰 장이제. 옛날에 비하믄 많이 죽었지만. 1930~1940년까지만 해도 인구가 목포, 광주 다음으로 많았응께. 생각해보쇼. 얼매나 컸능가. 벌교장을 볼라고 소 구루마를 끌고 이틀이나 걸어서 오기도 했당께."

 

시장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벌교 토박이 윤두봉씨의 회상이다. 세월이 흘러 북적이던 시장은 많이 늙고 차분해졌다.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의치가 않다. 거금을 들여 지은 2층 새 시장 건물도 옛 영화를 회복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도 벌교장은 여전히 큰 시장이다. 전남 동부권을 대표하는 장이다. 쏠쏠한 장구경도,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도 그대로다. 갯것들의 비릿한 내음도 변치 않았다.

 

벌교오일장에 가면 꼬막과 함께 꼭 맛을 봐야 할 게 있다. '장터국밥'이다. 싸고 푸짐한 국밥 한 그릇을 먹어야 벌교장 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커다란 무쇠 솥에선 연신 김을 뿜어낸다.

 

구수한 국밥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진하고 담백한 육수에 돼지 내장이 한 가득이다. 한 그릇에 3000원. 다 내 자식 같아서 "이문 생각 않고 더 주고만 싶다"는 국밥집 주인장(조형기씨 부부)의 따뜻한 마음도 받을 수 있다.

 

찾기는 쉽지 않다. 간판도 없다. 건물 벽에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팀이 다녀갔음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린 게 전부다. 시장 끝자락에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김범우의 옛집을 비롯 횡갯다리, 부용교, 현부잣집, 철다리, 회정리교회, 금융조합 등이 지척이다.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벌교장, #벌교역, #벌교꼬막, #철다리, #벌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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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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