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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읍 태령산 아래에 있다. 집 뒤로 태령산(오른쪽)에서 만뢰산(왼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 김유신 생가 충청북도 진천읍 태령산 아래에 있다. 집 뒤로 태령산(오른쪽)에서 만뢰산(왼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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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의 태령산 아래에는 김유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만노군(태수 김서현) 관아의 관리와 병사들이 이용했던 우물이 있다. 우물의 이름은 연보정(蓮寶井). 김유신 생가에서 태령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의 초입에 있다.

연보정에서 태령산 정상 461.8m 높이에 있는 김유신 태실까지는 30분가량 걸린다. 등산로가 대부분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위험한 느낌을 받을 만한 지점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탄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끝까지 오르는 데에는 여름이면 '땀 한 말'이 들고, 겨울에도 내의는 '살폿' 젖는다. 그저 평범한 등산길이라고 소문을 내어도 무방할, 우리나라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산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르막길을 계속 걸으면 어느덧 능선에 닿는다. 이 능선에서 곧장 내려가면 김유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솥 아홉 개를 걸었다는 구수(九水)마을이 나온다. 그러나 이곳 능선은 반대편으로 곧장 내려가 구수마을까지 길이 이어지는 재가 아니다. 구수마을로 바로 하산하는 길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이곳은 왼쪽의 만뢰산 정상과 오른쪽의 김유신 태실로 가는 삼거리일 뿐이다.

멀리서 본 태령산 정상의 모습. 산꼭대기가 아니라 무덤처럼 보인다. 이 부분의 맨위,가장 높은 곳이 김유신태실이다.
▲ 무덤처럼 조성된 태령산 정상 멀리서 본 태령산 정상의 모습. 산꼭대기가 아니라 무덤처럼 보인다. 이 부분의 맨위,가장 높은 곳이 김유신태실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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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태실까지는 200m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다. 지금부터 가는 짧은 길이 바로 그렇다. 예까지는 비록 땀은 솟아도 무서울 것 없이 성큼성큼 올랐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허위허위 발걸음을 마구 내디뎌도 좋은 그런 만만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좁은데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점점이 박힌 돌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양옆이 거의 절벽처럼 가파른 산비탈로 된 험상궂은 길이다. 태령산이 갑자기 왜 이리 화가 나셨을까. 김유신 장군의 태실을 찾아가는 길이니 발길 하나하나라도 정성들여 놓으라는 가르침인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태실을 축조하느라 쌓은 돌들이 살짝 아랫도리를 드러낸다. 저기가 바로 김유신 태실이다. 태실 옆에는 계속 동쪽으로 하산하면 백곡호수로 가는 313번 지방도로에 닿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이정표가 있고, 태실의 문화재적 가치를 말해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장군에게 엎드려 인사를 올린 다음, 태실 주위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니 진천읍 전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태실 둘레로 나무만 자라지 않았다면 동쪽으로 백곡호수, 서쪽으로 만뢰산 정상까지 사방 모두가 한눈에 두루 잡힐 그런 자리이다. 김서현 부부가 왜 여기에다 아들의 태실을 만들었는지 대뜸 짐작이 된다. 이렇듯 트인 곳이니 아들의 앞날도 그처럼 환하리라, 두 사람은 그렇게 믿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김유신 태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실로, 충청북도 진천의 태령산 정상에 있다.
▲ 김유신 태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실로, 충청북도 진천의 태령산 정상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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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앞 안내판은 산에 오르기 전 생가터 유허비 앞에서 읽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다. 본문 중 아랫부분을 차지하는 태실 관련 설명만 다시 읽어본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와 역대의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태령산이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안내판의 말은 김유신열전 중 '庾信胎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유신의 태가 간직된 높은 산을 지금 태령산이라 한다)'이라는 대목을 말한다. 그러므로 김유신 생가터 뒷산에 태령산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정상에 서현 부부가 아들 유신의 태를 묻은 데서 유래되었다.

생가터 뒷봉우리가 본래는 만뢰산의 한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불과하므로 별도의 '산'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이 축조'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데다, 그것도 주인이 김유신이었으니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던 것이다.

유신의 부모가 태령산 정상에 아들의 태를 묻은 것은 자식의 장래에 도움을 주려는 신앙적 행위였다. "풍수학(風水學)에서 아뢰기를 '태장경(胎藏經)에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남자가 만약 (태를 묻을)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중략)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진되는 것입니다"라는 <문종실록>의 기록처럼, 유신의 부모 또한 태를 좋은 땅에 묻어야 아들이 잘된다는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경북 성주 태봉의 세종대왕자태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축조된 태실 유적이다.
▲ 세종대왕자태실 경북 성주 태봉의 세종대왕자태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축조된 태실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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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실지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선석산 태봉 일대에 마련되어 있는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이다. 국가 사적 제444호인 이곳 태실에는 조선 세종대왕의 적자 및 서자 18왕자와 단종의 태가 모셔져 있다.

성주 선석산 태봉은 애초 성주 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묘와 묘각이 있던 작은 봉우리였는데, 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 전국 최고의 길지(吉地)를 찾던 중 '바로 여기!'라는 판단이 들자 이미 있던 묘를 옮기게 했고, 세종 20∼24년(1438∼1442) 왕자들의 태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곳을 '산'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저 태봉(胎峰)일 뿐이다. 선석산 줄기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들판과 맞닿는 봉우리에 성주 태'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뢰산 능선이 동쪽으로 뻗어와 들판으로 뚝 떨어지는 봉우리도 태령'봉'이라 불러야 합당하겠지만, 김유신을 기리는 존경심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은 기어이 이 봉우리를 '산'으로 한 등급 높여 부르는 예우를 하고만 셈이다.

그런가 하면,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설명도 김유신의 태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김유신은 망국 금관가야의 손자일 뿐 신라의 왕자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부모는 유신의 태실을 축조했다.

뒷날 삼한일통의 업적을 완수한 공로로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는 우러름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만노군 태수의 아들로 태어났던 595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673년까지 결코 '현실'의 왕자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왕실 자녀가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태실을 남긴 장본인이 바로 김유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태령산 정상의 김유신 태실은 서현 부부가 아들에게 건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강력히 증언하는 유적이다.

태실은 왕자나 공주의 것이지만... 김유신은 예외

멀리 진천읍이 보인다.
▲ 눈이 남아 있는 김유신 태실 멀리 진천읍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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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김유신이니, 출생과 관련한 남다른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진평왕 17년에, 해와 달, 그리고 화수목금토성이 합해진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다(稟精七曜 故背有七星文)'고 기록하고 있다. 또 '신이한 일도 많았다(又多神異)'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김유신 관련 사건들 중에서 출생과 관련된 대표적 신이(神異)를 간추려서 읽어본다.

고구려 국경에 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이 일어나자 보장왕이 점쟁이 추남(楸南)에게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이 점을 쳐보더니 '왕후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했다. 왕후는 추남을 '요망한 여우'라고 욕하면서 왕에게 다른 점을 쳐서 시험하되, 맞추지 못하면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쥐 한 마리를 상자 속에 넣어두고 추남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맞춰보라는 요구가 떨어졌다. 추남이 대답했다.

"쥐가 여덟 마리 들어 있습니다."

왕후는 '틀렸다'며 추남을 죽이려고 했다. 추남이 말했다.

"내가 다음 세상에 반드시 장군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오."

마침내 추남은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상자를 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보장왕과 왕후, 그리고 고구려의 신하들은 그제야 추남이 너무나 신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고구려왕은 꿈을 꾸었다. 추남이 신라 김서현 장군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객을 보내어 김서현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래서 백석(白石)이란 자를 신라로 보내어 화랑 김유신의 낭도로 잠입시켰다. 하지만 나림(奈林, 경주 낭산)과 골화(骨火, 영천), 혈례(穴禮, 청도)의 신령들이 막아주어 유신은 무사할 수 있었다.

경주시 김유신 집터에 그의 가족이 쓰던 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 이름은 재매정이다.
▲ 경주 김유신 가족의 우물 속 경주시 김유신 집터에 그의 가족이 쓰던 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 이름은 재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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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유신의 출생에 얽힌 신이한 꿈 이야기가 나온다.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경신일(庚辰日) 밤에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의 어머니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동자가 황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가운데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얼마 후 만명부인은 아이를 임신하여  20개월 뒤 유신을 낳았다. 서현이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경진일 밤에 좋은 징조의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름을 '경진'이라 지어야겠지만 예법에 날과 달로는 이름을 짓지 않으니 경(庚)과 닮은 글자인 유(庾)와, 진(辰)과 소리가 비슷한 신(信)으로 이름을 지으면 어떻겠소? 옛날 현인에 유신(庾信)으로 이름을 지은 이가 있었으니 괜찮지 않소?"

그리하여 이름을 유신이라 지었다.

경주 반월성 옆의 김유신 집터. 멀리 선도산 방향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 김유신 집터 경주 반월성 옆의 김유신 집터. 멀리 선도산 방향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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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축을 갖춘 김유신 태실, 신이한 내용의 김유신 탄생 설화는 '역시 김유신'이라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왕은 아니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임금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끝맺음했으리라.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 서적이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사적이 없어져서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도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위인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태그:#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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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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