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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생가. 뒤로 김유신의 태실이 정상에 묻혀 있는 태령산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 끝에 유허비도 조그맣게 보인다.
 김유신 생가. 뒤로 김유신의 태실이 정상에 묻혀 있는 태령산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 끝에 유허비도 조그맣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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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에서 가장 두드러진 김유신 유적지는 생가터와 태실이다. 모두 태령산에 있다. 찾아가는 길도 간단명료하다. 진천IC에서 내려 곧장 읍내로 들어간 다음, 군청을 왼쪽에 두고 계속 나아가면 오르막이 나타난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즈음에는 김유신을 기리는 길상사(吉祥祀) 이정표가 도로변 오른쪽에 세워져 있어 '과연 진천은 김유신 유적지이구나' 싶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속담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했는데, 내리막이 끝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직진을 하면 금세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송강 정철 유적지에 닿는다. 그의 사당(祠堂)인 정송강사와 묘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김유신을 찾아가는 길이므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야 한다.

송강사
 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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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얼마 가지 않아 세 갈래 길이 삼지창 같은 모양을 하고 앞을 가로막는다. 세 갈래 길 중 오른쪽으로 난 도로로 들어가면 김유신의 자취가 남아 있는 구수마을, 개죽마을, 성대리, 장군봉, 서술원 등으로 간다. 하지만 이곳 삼거리는 지리를 모르면 헷갈리기가 아주 십상이다. 왜냐하면 가운데 좁은 길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잘 보이지 않는 길이 바로 김유신 유적지로 찾아가는 진입로이다. 오른쪽 길과 가운뎃길 사이에 불쑥 솟은 봉우리가 바로 김유신 태실이 있는 태령산이라는 사실을 초행자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삼지창 모양의 세 갈래 도로 중에서도 가운뎃길이 '김유신로'인 것이다. 셋 중 가장 좁은 길이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처럼 이 길로 들어서야 제대로 답사지에 닿을 수 있다.

그래도 꼼꼼하게 사방을 살피는 답사자는 좌우로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녹색 바탕 흰 글씨의 이정표도 발견할 수 있고, 그 아래에 버티고 있는 화강암 길안내 비석도 볼 수 있다. 무릇 역사유적이나 문화재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짙은 갈색 바탕에 흰 글씨로 세워지는 법인데, 이곳은 무슨 까닭인지 색깔을 달리하기 때문에 언뜻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정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녹색 바탕의 양철판 이정표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 / 보탑사 / 보물 404호 백비 / 농촌 전통 테마마을 / 생거진천 화랑휴양촌 보련골 / 보탑사 방면 4.6km'라는 크고 작은 흰 글씨가 여섯 줄로 복잡하게 쓰여 있다.

김유신 생가로 들어가는 길목의 안내 표시들
 김유신 생가로 들어가는 길목의 안내 표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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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아래에는 네모난 바탕돌에 역사적 내력을 밝히고, 그 위에 다시 산 모양의 돌을 얹어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 / 태령산 / 화랑무예 태권도 성지'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빗돌이 세워져 있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2002년 9월에 충청북도 도지사와 진천군수가 공동명의로 세웠으니 깃든 정성만은 인정을 해주어야 마땅한 빗돌이다. 하지만 주변의 어수선한 풍경에 가리어 좀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세운 이의 마음도 묻혀버렸고 답사자에게도 별 도움이 못 되는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차를 멈추고 내려서 빗돌을 읽는 부지런한 답사자는 김유신 탄생지가 1999년 6월 11일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빗돌을 읽은 답사자는 드디어 태령산을 오른쪽, 만뢰산 줄기를 왼쪽에 둔 채 그 사이로 난 도로를 타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금세 생가터인 '담안밭'에 닿는다. 담안밭은 삼거리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태령산 등산로 바로 입구에 있는데다 도로변에 커다랗게 '김유신 장군 탄생지'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바로 발견할 수 있다.

김유신 유허비. 생가 오른쪽에 있다. 이 유허비 옆에서부터 태령산 등반이 시작된다.
 김유신 유허비. 생가 오른쪽에 있다. 이 유허비 옆에서부터 태령산 등반이 시작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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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입구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비각 하나가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고, 왼쪽으로 생가 복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비각 안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물론 김유신 장군 유허비이다. 유허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앞의 안내판에는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이라는 제목에 이어,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문봉리' 일대의 생가, 연보정, 태실 등 김유신 유적이 '국가사적 414호'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안내판의 본문을 읽어본다.

이곳 계양마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화랑이 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자주성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태대서발한이라고도 함)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 시대까지는 국가에서 주관하여 봄과 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탄생지 일대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연보정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와 역대의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겨울에 찾은 김유신 생가. 사진 오른쪽 끝에 유허비, 집 뒤로 유신의 태실이 있는 태령산 정상이 보인다.
 겨울에 찾은 김유신 생가. 사진 오른쪽 끝에 유허비, 집 뒤로 유신의 태실이 있는 태령산 정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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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태어나 살았던 집터를 둘러본다. 만노군 태수 김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 그리고 유신, 흠순, 보희, 문희 등의 아들딸들이 살았던 집이 무너져 버린 후 동네사람들이 '담안밭'이라고 불렀다는 바로 그 집터이다. '담안밭'이라는 이름은, 태수의 사택이었으므로 당연히 사방으로 담이 둘러져 있었는데, 건물이 무너진 후 집터가 농작물을 심어 가꾸는 밭으로 쓰이게 되면서 '담 안의 밭'이라 하여 그렇게 작명(作名) 되었다.

생가터에는 아담한 기와집 한 채가 산비탈에 외로이 서 있다. 삼국 시대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채도 없으니, 이곳의 김유신 생가 역시 신라 때의 집은 아니다. 1983년에 복원된 것으로, 넓은 풀밭에 저 홀로 고즈넉하게 웅크리고 있어 보는 이에게 안쓰러움을 안겨줄 정도이다. 하지만 어언 30년의 세월을 태령산 아래에서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비바람을 맞은 탓인지, 기둥이며 서까래들에는 제법 검은 빛이 뚜렷하게 배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덕분에, 근래 들어 으리으리하게 복원된 생뚱맞은 새 건축물들보다는 오히려 역사유적지다운 느낌을 안겨준다.

생가 마루에 앉아 마당에 어수선하게 자랐다가 말라버린 겨울풀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풍경을 바라본다. 언뜻 경주 반월성 인근에 있는 그의 집터가 떠오른다. 진천의 생가터든 경주의 집터든 지난날의 사연은 다 땅에 묻어버린 채 텅 빈 맨 땅으로 변해 있다. 그래도 경주 집터에는 재매정(財買井)이라는 우물이나마 남아 있건만, 이곳 태령산 아래 생가터에는 그것도 없어 더욱 답사자를 애잔하게 만든다.

생가터 뒤편 국궁 연습장 위에 가면 김유신 가족과 만노군 관아에서 쓰던 우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왼쪽)우물 안 (오른쪽)성처럼 쌓은 우물 안의 벽
▲ 연보정 생가터 뒤편 국궁 연습장 위에 가면 김유신 가족과 만노군 관아에서 쓰던 우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왼쪽)우물 안 (오른쪽)성처럼 쌓은 우물 안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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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망과 허탈은 너무 성급하다. 진천 생가터에도 우물은 남아 있다. 재매정처럼 집 마당 안에가 아니라 태령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우물 이름이 연보정(蓮寶井)이다. 만노군 관아가 쓰던 우물이라고 전해진다. 생가터에서 태령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접어들어 100m 남짓 가면 오른쪽에 작은 연못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 연못이 메마르지 않도록 쉼 없이 찬물을 공급하는 우물이 바로 연보정이다. 물론 연못보다는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다.

특히 생가터와 연보정 사이에 세워진 국궁(國弓) 연습장이 있어 우물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지금 시대의 궁수(弓手)들이 한바탕 시위를 날린 후 시원한 냉수로 갈증을 풀듯이, 아마 만노군 시절을 살았던 신라의 병사들도 이 연보정의 샘물을 떠 마시며 타는 목마름을 해소했을 것이다. 연보정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어본다.

생가터와 연보정(김유신 가족이 사용하던 우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국궁 연습장. 국궁 쏘는 연습장소로는 아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생가터와 연보정(김유신 가족이 사용하던 우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국궁 연습장. 국궁 쏘는 연습장소로는 아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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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정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공이 신라 시대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에서 사용했던 우물로 전해지고 있다. 연보정은 자연석을 이용해 둥글게 돌려 쌓았으며, 규모는 직경 1.8m, 최고 높이 2.6m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하여 상단과 하단에 고식(古式)의 석축(石築)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나, 위쪽에 가공한 돌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석으로 쌓은 돌들이 무너져 나중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면에 우물로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하고, 다시 4m 가량의 수로를 설치하여 물이 흐르도록 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우물은 태령산 중턱에서 나오는 지하수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수로의 좌우에도 정교한 석축이 남아 있으며, 주위에는 막쌓기 식으로 축조한 3단 석축이 있어 만노군 치소나 옛 사우(祠宇)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우물은 김유신 장군과의 관련만이 아니라, 신라 시대에 성을 쌓을 때 사용하던 수법과 같이 자연석을 이용하여 옛 식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보정(왼쪽)과 경주 재매정(오른쪽)
 연보정(왼쪽)과 경주 재매정(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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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의 본문에 나오는 말처럼 연보정은 계단을 밟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 깊은 우물이 아니니 위험할 것도 없으므로 한번 내려가본다. 오늘 여기까지 와서 이 물맛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은 전쟁터에서 돌아왔다가 가족들과 대면도 하지 않고 다시 싸움터로 나간다. 그러면서 그는 집의 우물(재매정)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오게 하여 마신 후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한다. 좀 인정머리가 메마른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왕명을 수행하기에 너무나 바빴던 까닭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도 아니고, 필자는 군인도 아니다. 이 평화로운 여행길에서, 김유신이 마셨다는 연보정의 물 한 모금을 아니 마시고 지나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두 손을 모아 손바닥으로 샘물을 담아 마시면서 호기롭게 외쳐본다.

"물맛은 옛날 김유신이 마실 때 그대로구나!"


태그:#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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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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