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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한산 이씨 아계공파 14대 종가를 찾았다. 마을 안길은 최근 내린 눈이 미처 녹지 않은 상태였다.

 

한산 이씨인 이남규선생 고택을 지나 방산저수지 제당길로 휘돌아 올라가니 느티나무 세 그루가 물 속에 서 있는 삼지연이 보인다. 그 위로 산맥이 부드럽게 흘러내려온 곳에 아계 이산해 선생의 묘가 있다. 그리고 사당과 제실이 위엄있게 지붕을 펼쳤고, 그 바로 아래 종손 이한복(78), 권희금(75) 부부가 산다.

 

1970년대 말 방산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백년 이어 내려오던 종가가 물에 잠기자, 부부는 조상님과 더 가까이 둥지를 틀었다.

 

"사당문은 정문으로 들어가는게 아니고, 언제나 오른쪽문으로 들어가 왼쪽문으로 나가능겨. 계단도 가운데는 밟는 게 아니고."

 

이 옹은 혹시라도 방문객이 실수할까봐 사당의 예법을 미리 설명했다. 400년 넘은 유서깊은 문중 답게 영정과 유품들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옹이 아계 선생의 유품들을 보여주며 설명하는데 그 말투와 몸놀림에 서두름이라고는 전혀 없다.

 

사당 우측 아래엔 제실이 자리잡고 있다.제실안, 네 벽에 걸린 아계 선생의 글씨 사진들까지 모두 보고서야 종부(宗婦) 권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아계 선생의 명성이야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터, 이번 취재를 통해서는 위엄 높은 종가에서 한 시대를 살아온 종갓집 며느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사진을 찍고 자꾸 말을 옮겨 적느냐"며 당사자가 한사코 취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권씨는 결국 15대 종손인 아들 희원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마지못한 듯 취재에 응했다.

 

"왜 자꾸 사진을 찍는댜."

 

종갓집 며느리. 유교를 숭상한 오랜 세월 속에서 한 여성에게 운명처럼 찾아왔을 그 큰 책임과 의무 속에서 한시라도 마음 편한 날이 있었으랴. 400년 넘게 대대로 이어 내려온 가문의 큰 살림을 맡아 4대봉사(四代奉祀)에 시제, 한식, 명절차례까지 1년에 열두 번 제사에, 무시로 찾는 집안 어르신, 손님들 접대까지 무엇 하나 조심스럽지 않은 게 없다.

 

"종갓집이 뭔지두 물르고 왔쥬. 친정이 홍성 금마 세무신디, 그 시절 시악시는 혼인이나 제사에 안 나가는 거였거든. 그러니 암 것 두 할 줄 물르고 시집왔쥬."

 

혼례를 마치고 신행왔을 때 편찮아 누워계시던 시어머니는 두 달 뒤 돌아가시고, 이태 뒤에는 시아버지 상마저 치렀다. 그리고 시할아버지와 10살 안팎이던 시동생 3명, 시누이 1명을 자식처럼 돌보며 슬하에 3남 2녀를 낳아키우고 그 큰 살림을 해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디 섧은 게 아녀. 무신 정이 들었으야지. 그냥 덜컥 겁부터 나대. 근디 종부(宗婦)로 타고 난 걸 워치켜. 허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구. 시할아버지가 굉장히 자상하셨어. 시동생들도 착허구. 그래 힘든 줄 물르구 살었쥬."

 

듣고 있던 이 옹이 나선다. "우리 집안도 집안이지만, 안동 권씨는 그보다 더 세가 강헌디, 와서 고생 많었지."

 

"아버님은 마을 이장일, 조합일 보시느라 사실상 집안일, 농사는 어머님이 거의 하셨죠. 담배농사 40년, 누에농사 20년을 지으시며 시댁식구, 자식들 모두 뒷바라지 하셨는데 추석 때면 그 일을 어떻게 하셨나 싶어요. 담배랑 누에일이 겹치는 데다 송편까지 빚으셨는데…."

큰 아들 희원씨는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지난 삶을 애닯게 회상한다.

 

지금은 권씨가 시집 올 때 트럭 타고 건너 왔던 큰내도, 한겨울 개울에서 빨래 할때면 양동이 가득 더운 물 받아다 주던 시동생들과의 추억도, 시어머니를 대신해 살림 가르쳐주던 집안 아주머니의 자상함도 모두 저수지에 잠겨버렸다.

 

"친정서 막내로 자라 암것도 모르던 내가 시어머니도 읎이 종가집 살림을 어찌 알것유. 장 담는 거, 술 담는 거, 제사음식 죄다 가까이 살던 집안 아주머니한티 배웠쥬."

일가 아주머니는 마을이 수몰되면서 부천으로 떠났고, 평생 친정어머니 모시듯 하겠다던 생각은 세월 따라 아쉬움만 남기고 있다.

 

종갓집의 설 준비

 

"설에는 짠지두 다 담아놨것다 일 없쥬. 떡국만 끓여서 차례지내는디 뭘."

"술은 안 담그세요?"

"제주(祭酒)는 해야쥬. 제사때마다 술을 새로 담그니께 1년내 용수는 안떨어쥬."

"다식 같은 것도 다 사다 쓰세요?"

"왜유. 다식은 집에서 박지유. 봄에 따서 뫼둔 송화가루로다가."

 

대체 뭐가 일이 없다는 건가? 요즘 사람들 보기엔 그게 모두 번거로운 '일'인데 이 어른, 그쯤은 일도 아니라는 식이다.

 

"옛날에 비하면 일두 아뉴. 과줄두 죄다 직접 허구, 엿 두 고구 다 했는디 인제는 못 맨들어. 헐수가 읎어."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다식판이 다 닳아 무늬를 하나도 알아볼 수 없게 돼 얼마전 새 다식판을 샀다하니, 일상처럼 이어지는 종가의 행사가 조금은 짐작이 된다. 예전 다식판을 보여달라는 청에 이 옹이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간다. 전통을 이어가는 종가라지만 아내 귀한 줄 알고, 안살림 거드는 자세는 제대로 현대화 된 듯하다. 이 댁에서는 제사 때 지금도 놋제기와 놋반상을 쓴다.

 

"다식판두 놋제기두 언젯 적부터 쓰던 건지 몰류. 나야 시어머니한테 물려받았으니, 그 이전 언제부터 쓰던 건지."

 

제사가 잦다보니 놋그릇의 색이 크게 변할 새도 없는데, 그래도 때마다 닦아 올린다.

 

 

"놋그릇은 젊은이들이 닦유. 힘이 들어가야 허니께. 옛날에는 지푸라기에 지왓가루 묻혀서 닦었는디, 요새는 약으루 다 허유."

 

제삿날이면 읍내에 사는 큰며느리 김혜숙(54)씨가 와서 함께 지낸다. 그러니까 그가 15대 종부다.

 

"낮에 와서 지짐질 하구, 저녁에 또 오고 할라니께 큰메느리가 어렵지유. 옛날에는 행랑이 다 있어서 도와주구, 동네에 일가가 다 모여 살았으니께 같이들 혀서 시사, 한식 때 100명 가까이 모여두 할만 혔지만 지금은 사람이 읎으니께 심이 들어. 내가 헐 수 있는 만큼 허다가 메느리한테는 물려주지 말아야지 허는디…. 물르쥬 지들이 한다면 또…."

 

한 시대가 가고난 뒤...

 

이 집안의 종손은 현재 16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15대손이 예산군청 상하수도사업소에 근무하는 이희원(54) 상하수도시설담당이고 그의 아들 16대손이 장성해 군에 입대해 있다.중매결혼을 한 희원씨는 결혼할 때까지 처가에 종손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5남매 중 장남이라고만 했죠. 우리 아들 장가갈 때요? 그거야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세상이 변했는데 종손이라고 뭐 크게 장가가기 힘들라구요. 하하."

 

노부부의 가장 큰 자랑은 군 복무중인 손자 충수씨다.

 

"우리 손자 충수가 아계 할아버지 제삿날에 태어났잖어. 그래서 충성충(忠)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는디, 알오티씨루 군대가서 이렇게 상까지 받았어. 봐, 훈련생 4000명 넘는데서 1등 났다고 부대장한테 직접 상받고 시계까지 탔잖어."

 

이 옹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글씨가 새겨진 쪽을 보여준다. 그 얼굴이 어찌나 환한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비싼 거는 아니라두 귀한 거쥬."

 

할머니가 조용히 옆에서 거드는데, 할아버지 그게 끝이 아니다.

 

"군인이 월급을 타면 얼마나 타것어. 근디 첫 월급 탔다고 할매거 따로 내거 따로 봉투 두 개를 해서 가져왔더라구. 들에서 일하구 있는디, 우리 손자가 들에까지 나와서 하나씩 떡 안기더란 말여. 돈 10만원이 들어 있는디, 그게 몇 억 같더라구유."

 

충수씨도 제대하고 난 뒤, 때가 되면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문에 16대 종부가 들어오게 된다는 얘기이고, 언젠가 17대손이 울음을 터뜨리는 날도 올 것이다. 과연 그동안 대대로 내려온 종가의 일은 어떻게 이어질까. 그것은 세월만이 알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충남 예산지역 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종갓집, #한산이씨, #아계공파, #예산군, #종갓집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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