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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 이번 영국여행 중에서 내가 가장 기대하던 곳이었다. 런던과 그 주변은 대학생 때 한번 답사를 하였으므로 호기심이 반감되어 있었지만 하이랜드는 내 마음 속에서 항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하이랜드 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직접 가서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그곳은 네스호(Loch Ness)였다. 그곳은 초등학교 때 어린이 책 전집 안에 흑백사진으로 신비하게 가슴 설레게 하던 괴물이 살던 곳이었다.

아침 일찍 아내와 딸을 재촉하여 에딘버러(Edinburgh)의 한 버스투어 회사 앞에 모였다. 여러 나라의 자유 여행자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출발했다. 버스는 인버네스(Inverness)를 지나서 82번 도로를 25km 더 달렸다. 수많은 절경의 호수를 지나온 버스의 차창 밖으로 드디어 네스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짙은 물색이 인상적이다.
▲ 네스호 짙은 물색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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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동전은 구분하기 어려워!

버스는 네스호에 도착하자 우리를 네스호 중앙 부분에 자리한 어쿼트(Urquhart) 성에 내려준다. 이 성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하이랜드 투어 광고 팸플릿에 항상 나오는 유명한 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쿼트 성은 네스호의 검붉은 물결을 배경으로 반쯤 허물어진 성채가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한 해에 수십만 명이 다녀간다는 이 성에서 나는 가장 즐겨하는 옛 성채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여행자들 중에는 어쿼트 성을 보지 않고 네스호 선착장으로 먼저 이동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외견상 무너진 성벽만 남은 유적지에 관심이 없거나 꽤 비싼 입장료를 아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에딘버러에서 출발한 이 하이랜드 투어 버스의 요금은 물가에 비해 싼 편이지만 네스호 유람선 승선료와 어쿼트 성 입장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지 현장에서 입장료를 걷으니 가이드 아저씨는 버스를 가득 채운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입장료를 현금으로 받을 수 밖에 없다. 가이드 아저씨가 스코틀랜드 지폐와 동전으로 거스름돈을 남겨주는 게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나도 우리 가족 3명의 입장료를 지폐로 주었다. 가이드가 동전으로 잔돈을 남겨주려다가 나에게 동전이 없느냐고 물어본다.

솔직히 스코틀랜드 동전은 같은 영국 내에서도 다르게 생겨서 헷갈린다. 그리고 런던에서도 영국 동전을 사용한 일이 벌로 없어서 동전 확인하기가 영 불편하다. 내가 대답을 않고 잠시 머뭇거렸더니 신영이와 대화를 몇 번 나눴던 가이드가 신영이에게 통역을 해달라고 한다. 신영이는 웃으면서 아빠와 이야기하란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동전을 펴서 가이드에게 보여주었다. 스코틀랜드인 가이드는 잔돈을 알아서 골라갔다. 역시 대화가 깊게 들어가면 영어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성에 가는 작은 언덕길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 어쿼트성 가는 길 성에 가는 작은 언덕길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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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 입구에서 공동 구매한 입장권을 단체로 제시하고 어쿼트 성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우리 나라 지하철의 개찰구 같이 생긴 출입구를 통과하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니 어쿼트 성을 테마로 한 전시실과 기념품 가게가 있다. 우리가 모두 건물 외부로 나오자 가이드 아저씨는 어쿼트 성이 보이는 언덕 위에서 노련한 솜씨로 어쿼트 성의 역사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유머가 끊이지 않아 즐거운 사람이다.
▲ 스코틀랜드인 가이드 유머가 끊이지 않아 즐거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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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성과 괴물이 산다는 호수, 한 편의 그림

이 언덕에 서서 보니 어쿼트 성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은 현재 윗부분이 모두 사라져 아래부문만 남은 폐허다. 어쿼트 성은 내가 바라보는 쪽에서 성 뒤편의 네스호와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풍긴다. 신비의 괴물 '네시(Nessie)'가 산다는 호수 앞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성은 연출이라도 한 듯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이 반쯤 무너져 있기에 더욱  판타지 소설의 무대같이 신비롭다.

가이드 아저씨의 영어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억양이 강하다. 이곳이 스코틀랜드이기 때문에 내가 불평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내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어 가이드 내용을 모두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어본 바에 의하면 이 성의 내력은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성이 무너져 내린 모양이 묘하다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적의 공격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무너뜨린 것이라고 한다. 영국 명예혁명 후인 1692년에 왕당파인 윌리엄(William) 왕이 급진 혁명파 군에게 성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 아름다운 성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네스호를 바라보는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 잡은 어쿼트 성은 수백 년 동안 많은 왕들과 여러 귀족가문들에 의해 뺏고 뺏기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고, 아예 왕이 반대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이 성을 부숴버린 것이다.

성을 공격하던 투석기를 복원해 두었다.
▲ 투석기 성을 공격하던 투석기를 복원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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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자세히 보니 성벽이 포탄이나 무기에 의해 함락된 것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부터 찍어 내린 듯이 헐려나간 모습이다. 중세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성채이자 요새였던 이 멋진 성을 일부러 파괴시킨 것이라고 하니 황당하기도 하다. 당시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성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이 성의 훌륭한 석재들은 네스호 인근 주민들의 집과 담에 가서 박히기도 했다. 황량한 스코틀랜드 자연의 비바람에 훼손되던 어쿼트 성은 현대에 들어서야 정비됐다.

가이드가 어쿼트 성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시간에 아내는 성 기념품 판매소의 화장실에 가 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 한정된 시간 안에 성을 봐야 할텐데 아내는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생리현상이니 뭐라고 재촉할 수도 없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기념품 판매소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그때서야 아내가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우리 여행 그룹의 다른 여행자들보다 조금 늦게 어쿼트 성을 향해 출발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지만 찬란한 해가 머리를 비추고 있다. 이번 영국 여행 중 매일 한 차례씩은 빗줄기를 만났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나는 성 전체를 한가하게 잠깐 조망하다가 잔디가 예쁘게 깔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검붉은 네스호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성이다.
▲ 어쿼트 성 검붉은 네스호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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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덕길의 잔디가 참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잔디밭 옆에는 성이 허물어진 이유라도 설명하려는 듯이 최근에 복원된 투석기를 가져다 두었다. 검푸른 네스호와 진초록의 잔디가 무너진 어쿼트 성과 어우러져 절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은 어쩌면 무너진 유적도 이토록 멋지게 만들어 놓는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잔디밭 사이로 난 황톳길을 가로질러 어쿼트 성으로 향했다. 어쿼트 성 위로 X자 십자가 모양의 파란 스코틀랜드 국기가 휘날린다. 성 입구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물길인 해자(垓子)가 있고 그 물길 위를 건너는 다리가 놓여있다. 해자의 물길이 원래 네스 호의 물길이라면 어쿼트 성은 네스 호수의 육지 가까운 곳에 붙은 요새 같은 섬 위에 자리하는 것이다.

요새같은 섬 위에 자리 잡은 '어쿼트 성'

잔잔한 호수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 네스호의 여인 잔잔한 호수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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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벽 사이사이마다 어쿼트 성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역대 어쿼트 성에서 살았던 지배자들의 부침과 그들의 삶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이 허물어진 성이 6세기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하니, 우리 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당시에 세워진 성이다. 현재의 성채는 13세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 오랜 성채인 것만은 확실하다.

허물어진 성 안에서 가장 높게 잘 남아 있다.
▲ 어쿼트 성 타워 허물어진 성 안에서 가장 높게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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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쿼트 성의 타워 부분은 많이 남아 있다. 타워의 가장 높은 층에는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탔던 여행자들이 벌써부터 올라가 네스호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빵을 만들던 빵굼터를 가족과 함께 둘러보다가 함께 계단을 타고 성벽 타워의 3층 위까지 올라갔다. 귓가에는 어디서인지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고 있었다.

구슬픈 음조가 네스호 위에 울려 퍼진다.
▲ 백파이프 연주 구슬픈 음조가 네스호 위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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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마치 벽돌로 쌓은 것 같이 보였던 성벽이 모두 돌을 갈고 닦아 크기에 맞추어 쌓은 것이었다. 타워 성벽의 무너진 면은 도끼로 잘라낸 듯 한 쪽 면만 날카롭게 부서져 있다. 전쟁에서 포탄을 맞은 것이 아니라 왕당파가 일부러 성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런 모양이 남은 것이다.

타워의 정상에서 내려다 본 네스호의 검은 물결은 잔잔하고 고요하다. 성벽의 큰 창문 앞의 바로 앞에 네스호 푸른 물결이 살랑거린다. 턱을 고이고 미동도 없이 네스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한가롭기만 하다. 성에서 바라보는 네스호 깊은 호수와 육지의 푸름은 성이 처음 지어졌을 때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타워에 서면 무너진 성벽과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 타워 전망 타워에 서면 무너진 성벽과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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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자유여행? 이건 아닌데...

겉보기보다 성의 규모가 커서 제법 둘러볼만 한데 이곳저곳 샅샅이 보면서 돌면 시간이 꽤 걸린다. 성 북쪽의 유적을 더 보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여행자들이 어찌 됐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같이 돌아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괜히 걱정이 되서 우리 그룹의 여행자들이 보이는지 찾아보았다. 가이드가 분명히 유람선이 떠나는 선착장에서 다시 집결한다고 하면서 배 이름까지 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선착장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그런데 선착장에도 우리 여행 그룹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들은 영어 설명에 대해 100% 확신이 서지 않아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시 성 안내소 입구로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 우리 여행 그룹의 여행자들이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언덕을 올라와 다시 안내소의 계단을 올랐고 우리가 버스를 내렸던 곳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돈을 내고 입장하는 안내소 입구에서 안내원에게 겨우 사정 설명을 하고 성 안내소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신영이가 투덜댔다. 가이드가 분명히 선착장에서 다시 집결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왜 이곳으로 다시 왔냐는 거였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영어를 갈고 닦은 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내가 왜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허둥댔는지 모르겠다. 내가 계획한 자유여행, 스코틀랜드의 북쪽 끝까지 와서 투어버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의 마음을 바쁘게 한 것인가? 안락한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가? 그 마음 아래에는 줄어만 가는 나의 영어실력에 대한 믿음 부족도 있었을 것이다.

신영이는 다시 들어온 어쿼트 성 안내소에서 발걸음을 다시 멈췄다. 기념품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신영이의 특기가 다시 발동한 것이다. 신영이는 스코틀랜드의 민요가 담긴 CD를 사고 싶어했다. 그런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선착장에서 네스호 유람선을 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신영이의 등을 떠밀어 성 근처의 선착장으로 향했다.

유람선을 타기 전에 네스호로 달려가본다.
▲ 네스호 유람선을 타기 전에 네스호로 달려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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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호의 검은 물결이 부딪치는 선착장에 도착하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우리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영어에 친숙한 신영이는 한가하게 네스호의 물에 손을 담그고 놀고 있다.

한국 돌아가면 영어공부 좀 해야겠다. 중학생 신영이가 영어 공부하는 시간에 나도 영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여행 때마다 느끼고 반성하는 일이지만 정말 영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현지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항상 자극을 받고 몸소 느끼는 여행! 내가 몽상가처럼 꿈꾸는 여행의 모습이다.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여행의 꿈에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1년 7.17일~7.27일의 영국 여행 기록입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 #어쿼트성,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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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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