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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일 만에 기적을 만들어냈는데 제 마음은 아직도 크레인에 있는 것 같다. 병원에 전기장판이 좋은 게, 따뜻한 게 왔다. '어머, 이거 크레인에 있으면 너무 좋겠다'. 올릴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호박죽을 어떤 분이 싸오셨는데 '이걸 어디다 두고 먹으라고 이렇게 만들어오셨지(웃음)'. 땅 멀미가 끝나면 다 해결이 될 줄 알았는데 거의 사회 부적응자다.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어느 화살표를 눌러야 할지 모르겠더라. 층수 구분이 하나도 안 된다 올라가야 하는 건지 내려가야 하는 건지. 오늘 치료 받으면서는 병원 안에서 길을 잃었다. 미아가 됐다."

 

'소금꽃' 김진숙이 강단에 섰다. 19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노동대학(학장 하종강) 2011년도 2학기 마지막 수업에서다.

 

검게 염색한 머리, 검은색 줄무늬 티셔츠, 검은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희망버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진분홍 빛 손수건을 목에 두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한 달에도 몇 번씩 강연요청이 오지만 어차피 올해 안에는 (크레인에서) 못 내려올 거라 생각했고, 마음속으로는 사실 내년 총선까지 (크레인 위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회대도 당연히 못 올 거라고 보고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지도위원은 현재 목과 허리의 디스크 증세로 부산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129', '60'. 크레인 올라갈 때 가장 두려웠던 숫자

 

 

'소금꽃 나무가 희망버스에게'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김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 지도위원이 모습을 드러내자, 피츠버그 홀을 가득 메운 300여명의 시민들이 "사랑해요, 김진숙"을 연호했다. 그러자 김 지도위원은 "인사는 이렇게 해야 맛입니다"라며 85크레인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팔을 높이 들어 흔들어 보였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된 강연 내내 김 지도위원은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객석에서는 연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 지도위원은 "크레인에서 딱 내려왔는데 제가 올라오고 나서 며칠 있다가 결혼한 친구가 있었는데 내려오니까 애를 낳았더라"며 "그런가 하면 올라갈 때 (태어난 지) 100일 무렵이었던 아이가, 내려왔더니 걸어 다니면서 '진숙아'(하더라), 309일이 엄청난 시간이었구나"라고 감회를 전했다.

 

김 지도위원은 "크레인에 올라갈 때 가장 두려웠던 숫자가 '129', '60'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김주익 지회장은 85크레인에 올라간 지 129일 만에 목을 맸고, 그때 김 지회장이 마지막으로 보고 갔던 조합원들의 숫자가 60이었다.

 

"60명이 제 머릿속에 무슨 주문처럼 박혀 있었다. '이번에는 60명이 며칠차에 달성될까'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두려웠다. 그런데 157일차에 1차 희망버스가 오면서 129일은 넘어갔다. 사람들이 밤늦게 영도대교 넘어서 촛불을 들고 용역깡패들이 접수한 공장 앞까지 와서 '김진숙, 김진숙' 연호하더라. 저는 크레인 위에서 손 흔들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조합원들이 사다리를 들고 '다다다' 뛰더라. 그러더니 그 사다리를 타고 사람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구나. 생각보다 우리 조합원들이 머리가 좋구나.(웃음)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저한테도, 여러분들한테도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래서 희망버스에 참가했던 승객들이 담을 넘어서 공장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매일 매일이 기적"이었다. 김 지도위원은 "그 전까지는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었는데, 1차 희망버스가 왔다가면서 어렴풋하게 희망이 생기고 미련이 생기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김진숙이 '본드 붙여놓은 식빵' 먹은 사연

 

 

35m 크레인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었지만 김 지도위원에게는 트위터가 있었다. 김 지도위원은 "트위터 중독이었다"면서 "기자들이랑 인터뷰할 때 하루 일과를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책 보고, 생각도 좀 하고, 정리도 좀 하고' 했지만 다 뻥이었다, 죙~일 트위터만 했다"라며 웃어보였다.

 

"트위터를 통해 처음 사람들이 살살 말 걸기 시작한 게, '뭐 좋아하세요', '뭐 먹으세요'. '고구마요'(하니까) 고구마를 보내오고. 처음에 사람이 왔던 게 아니다. 고구마가 제일 먼저 왔다.(웃음) 사과 먹는다니까 사과 보내주고. 그러더니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서울에서, 광주에서, 전주에서 심지어는 독일에 유학 가있던 학생까지.

 

핀란드에 있는 분이 오시기도 했는데, 제가 크레인 하루 벌금이 100만 원이어서 '하루 100만 원짜리 펜트하우스에 산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는데 이 분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고 핀란드 음대 교수다.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연주활동을 하는 분인데 이 분이 제가 자기하고 생활수준이 비슷한 줄 알았대요. 처음에는 '굿모닝'하면서 말을 걸기에, 제가 '김치를 보내줄까', '라면을 보내줄까' 멘션을 보냈다.

 

그런데 이 분이 나중에야 85크레인을 알았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앉아있는 인간이 핀란드에 있는 자기한테 '김치를 보내줄까', '라면을 보내줄까'. 도저히 이해를 못했다. 핀란드에서 18시간 비행기타고 와서 크레인 앞에서 2주일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종일 그 주변을 돌았다. '오사카 갔다 오는 길에 들렀습니다' 와서 또 며칠을 지내기도 하고.(웃음) 진짜 그런 깨알 같은 마음들. 얼마나 이분들이 간절한지…."

 

그런데 집행부의 "기만적인 합의" 이후 '행정대집행'이 이루어졌던 지난 6월 27일, 용역들로 둘러싸인 크레인에 전기가 끊어졌다. 트위터도 할 수 없게 됐다. 김 지도위원은 "세상하고 연결됐던 유일한 끈이 그 날로 끊어졌다. 그 절망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라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조합원들은 김 지도 위원에게 스마트폰 배터리를 올려 보내기 위해 '머리'를 썼다.

 

"식빵을 뜯어서 대용량 배터리하고 태양열 배터리를 넣고, 마개를 막아서 본드로 붙였다. 그때는 용역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라 식량 들어올 때마다 금속 탐지기로 스캔을 했다. 볼트가 있을까봐. 그 식빵이 어떻게 용케 들어왔다. 그런데 그 때는 전화도 도청이 되니까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게 본드 붙여놓은 식빵이다', '절대 먹으면 안 된다' 안 알려준 거다. 빵을 환장을 하고 먹었는데 쫄깃쫄깃 하더라. 잼인 줄 알고. 그런데 먹다보니 배터리가 나오더라."

 

트위터로 "소름끼치는 쪽지"를 받은 적도 있다. 김 지도위원은 "희한한 쪽지가 많이 와서 맞팔을 잘 안 했다"라고 말했다.

 

"이 분은 80년대에 운동을 하셨던 분 같다. '지금은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야 할 때다. 70년대를 연 것은 전태일이었고 80년대를 연 것은 박종철이었다. 지금 이 엄혹한 세계를 누가 열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라. 세계가 당신을 보고 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너나 죽어라'.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웃음) 희망버스가 없었다면 아마 엄청 고민했을 거다."

 

"<나꼼수>는 <나꼼수>만의 방식 있어...편가르지 말았으면"

 

김 지도위원은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실장이 구속된 후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제 미국에 있는 어떤 분이 트위터로 '김진숙씨가 송경동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멘션을 보내셨던데, 너무너무 아팠다"면서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명박이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면서 "그런 것들이 끝나는 날까지 희망버스는 어디든지 달려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지도위원은 "저한테 관심이 집중되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다"면서 "크레인 쳐다보고 울고, 강정 바위 쳐다보고 우는 희한한 경험을 했던 2011년의 간절한 마음들이 흩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나는 꼼수다>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김 지도위원은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정파가 강하고, 이러한 편가르기가 총선 때가 오니까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면서 "<나꼼수>는 <나꼼수>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꼼수>에게) '옛날에 우리들 최루탄 맞고 싸울 때 너희는 뭐했냐' 이러면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이 각자 가진 방식대로 자기 영역에서 자기실천들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쫓기듯이 운동을 해왔고 너무 팍팍하게 운동을 해왔다. 저도 80년대 전두환 때부터 운동했다. 편 가르는 거 되게 좋아한다. 사실은 그렇게 해왔다. 그런 저를 변화시켰던 것이 희망버스였고 트위터였다. '적'들보고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명박 귀 좀 열어라, 소통 좀 하자'고 하지만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가. 바로 제가 아닌가. 희망버스 보면서 느꼈다.

 

누군가 트위터 쪽지로 '2003년도에 김주익, 곽재규 죽인 게 누군데 노사모가 올 수 있나'라고 하더라.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갈 만한 세상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편 가르지 말고 배척하지 말고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태그:#김진숙, #희망버스, #나꼼수, #한진중, #한진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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