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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오륙년 전 남이섬의 추억

주차장에 즐비한 관광버스
 주차장에 즐비한 관광버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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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남이섬에서 워크숍을 하기로 정해졌다. 말이 워크숍이지, 실제론 관광지 벤치마킹이다. 그날 친구 딸 결혼식이 있었는데, 결국 난 남이섬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17일 아침도 최저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갔다. 그렇지만 계획대로 남이섬 워크숍은 진행된다.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40분이다. 가평나루 주차장에는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와 승용차 등이 가득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난다.

내가 삼십 오륙년 전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대학생들의 MT 장소였는데, 이제는 온 국민의 유원지가 된 것 같다. 정확히는 아시아의 대표관광지가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일본어, 중국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입구의 매표소도 출입국관리사무소라고 부른다. 그리고 비자 받는 곳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한마디로 국제화, 세계화를 한 것이다.

육칠십년대 남이섬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산
 육칠십년대 남이섬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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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는 가평쪽 가장 가까운 곳에 나루를 만들어 보트를 타고 들어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제대로 된 여객선이 운행을 하고 있다. 또 당시에는 남이섬 안에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당시 수종(樹種)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가로수길 형태로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것이 아마 지금의 잣나무길, 은행나무길, 메타세콰이어길이 된 것 같다. 그때 남이섬은 경춘관광개발(주) 남이섬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종합휴양지였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종합휴양지라는 개념은 같다.

당시는 남이섬에서 텐트를 치고 버너로 밥을 해먹던 기억이 난다. 소위 캠핑이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해변이나 강변에 텐트 치고 통기타 치며 노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로망에 빠지고 술에 취해, 나가는 보트를 놓치고 하룻밤 더 묵기도 했으니, 그게 바로 추억이고 객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이섬은 땅콩이나 심던 모래밭이었지만, 70년대 유원지를 조성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이제는 어엿한 남이나라 공화국으로 변화되었다.

여객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길

남이나라 여객선
 남이나라 여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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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이나라공화국의 입국심사대로 간다. 이름이 거창해서 입국심사대지 실상은 배타는 곳이다. 팔작지붕 형태로 된 정문을 지나면, 길은 수재창랑(守齋創廊, River Line)으로 이어진다. 처음에 나는 수재창랑을 水在滄浪으로 생각했다. 푸른 물결이 흐르는 물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안에 적힌 한자를 보니, 지켜주는 집이고 창조하는 복도다. 지킴과 창조, 그 뜻이 금방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문은 남이나라공화국 강우현 대표의 강연을 듣고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선착장에는 이미 배가 들어와 있다. 한번에 200~300명은 탈 수 있는 중형여객선이다. 배의 가장 높은 곳에는 태극기와 말레이시아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아마 오늘말레이시아 관광객이 오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동남아시아인들의 모습이 꽤 보인다. 배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하다. 연말인지라 배 안에 소원지(所願紙)를 적어 걸 수 있는 나무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해, 가족의 안녕을 위해, For Love & Peace 등 다양한 글귀가 보인다.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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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이제 가평 땅을 떠나 남이섬로 들어간다. 남이섬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번지에 위치한다. 그러나 남이섬은 2006년 3월 1일 동화나라 노래의 섬이라는 콘셉트로 독립선언을 한다. 핵심은 세 가지다. "남이섬에 동화나라를 세웁니다. 동화세계를 남이섬에 만듭니다. 꿈의 세상, 남이나라공화국을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의 공식 명칭이 남이나라공화국(Naminara Republic)이 되었다.

추위 속에 꽁꽁 얼어버린 조형물들

사랑과 평화의 등대
 사랑과 평화의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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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서서히 남이나라공화국에 닿는다. 남이나루 선착창 앞에 남이나라공화국 깃발이 휘날린다. 녹색의 대지 위에 황금색 달과 별이 떠 있다. 달은 그믐달이고 그 안에 별은 나침반 형태다. 동양적 정서와 친환경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배에서 내리니 '남이섬'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글자(Calligraphy)가 눈길을 끈다. 디자인 전공자인 남이나라 강우현 대표가 쓴 글자다. 그 옆에 '나는 남이섬에 산다. 남이섬은 오늘이 좋다.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라는 작은 글자도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는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등대처럼 보이는데, 눈과 입을 만들고 모자를 씌웠다. 그런데 입에서 물이 나온다. 재미있다. 정말 동화적이다. 그 물이 흘러내리면서 아랫부분은 얼어붙었다. 이 등대 이름이 '사랑과 평화의 등대'다. 이 등대 옆 물속에는 인어공주상이 서 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벌거벗은 채 허벅지까지 물이 올라와 있다. 다행히 북한강 물이 아직 얼지 않았다. 좀 추워보인다.

남이섬 대문
 남이섬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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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남이나라로 들어간다. 먼저 유니세프 '어린이 친화공원(Unicef child friendly park)'이 눈에 띈다. 유니세프(United Nations Children's Fund)는 유엔 어린이 기금으로,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1946년 만들어졌다. 이 공원을 통과하면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남이장군의 시를 만날 수 있다. 이 시에는 젊은 시절 큰 뜻을 품었던 위대한 장수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소.

실제 남이장군의 묘 맞아?

남이장군 묘역
 남이장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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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은 다음 남이장군 묘역으로 간다. 그런데 묘역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남이장군 추모비가 있다. 신도비 개념으로 최근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문인석과 촛대석이 있고, 상석이 갖춰져 있다. 이들 모두 제대로 형식을 갖췄다. 봉분 역시 둘레석을 제대로 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판서를 지낸 인물의 무덤 수준이다. 그런데 남이장군의 묘를 이곳 남이섬에 썼다는 애기는 처음 들어본다.

그럼 남이장군 어떻게 살다가 어디서 죽었을까?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이(1441-1468)는 세조 때인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었는데, 그 다음 해 유자광의 밀고로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비운의 장군이다. 그 후 그는 역사 속에 묻혀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1818년(순조 18년)에야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康純)과 함께 신원될 수 있었다.

남이섬의 남이장군묘 봉분
 남이섬의 남이장군묘 봉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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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의 가문은 할아버지 남휘(南暉)가 태종의 넷째 딸 정선(貞善)공주와 결혼하면서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남빈(南份)은 군수를 지냈다. 남이 역시 당세 세도가인 권람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처럼 남이의 집안은 왕실과 당시 세도가와 혼맥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17세 때인 세조 2년(1457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관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강순, 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면서 촉망받는 젊은 장군으로 이름을 날린다.

남이의 절정기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였다. 그는 강순·어유소와 함께 토벌군 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진다. 그리고 건주위의 여진족 토벌에 참가해 이등공신이 되었고, 그해 12월 27일 공조판서가 된다. 그는 세조 14년인 1468년 8월 병조 판서가 된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고 그해 10월, 병조참지 유자광의 밀고로 국문을 당해 환열형(轘裂刑)에 처해진다. 환열형이란 두 수레가 양쪽에서 끌어 당겨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목을 7일 동안 저자거리에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효수란 죄인의 목을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이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이장군의 실제 묘역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이장군의 실제 묘역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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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역죄인은 그 후손들이 묘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남이장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지에 있다. 남전리는 남이장군의 외가로 남양홍씨의 세거지였다. 그러므로 남이의 시신은 외가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남전리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묘를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 남이가 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 남이섬에 있는 남이의 묘도 역시 허묘다. 남이섬에는 옛날부터 남이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이섬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섬의 북쪽 남이나루 근처에 남이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돌무더기가 있었고,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액운이 낀다는 전설이 있었다.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이 남이섬을 매입한 후 남이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추모비를 세우면서 공식적으로 남이장군 묘라 칭하게 되었다. 묘 앞에 있는 남이장군 추모비의 글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썼다.

덧붙이는 글 | 12월 17일(土) 워크숍을 위해 남이섬에 다녀 왔다. 남이섬 관광지도 살펴보고, 강우현 대표의 강연도 들었다. 그 결과를 종합관광의 관점에서 4회 연재할 예정이다.



태그:#남이섬, #남이나라, #동화나라, #남이장군, #남이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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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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