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커피꽃에서 열매, 열매에서 생두까지의 과정을 커피나무의 잎에.
 커피꽃에서 열매, 열매에서 생두까지의 과정을 커피나무의 잎에.
ⓒ 채륜서

관련사진보기


어떤 생두가 좋은 생두일까? 한국에서 커피 공부를 할 때부터 이것이 나의 화두였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커피가 나지 않아서 커피 열매를 정제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야생 커피 열매를 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중략) 커피 열매는 따기 시작해서 30~70년 동안 수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이 농장에서 커피 열매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생두란, 인위적으로 만든 커피 농장의 생두보다는 정글에서 마구 자란 야생 생두이다.

10여 년 전, 나는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갔다. 커피 농장에서, 정글 속에서 커피와 함께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람들은 날 보면서 커피에 미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인생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 <커피 농장의 하루에서>

<커피 농장의 하루>(채륜서 펴냄)는 한 그루의 커피나무가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 생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글로 엮은 사진 에세이다. 저자는 필리핀 현지에서 커피 농장과 커피 학교를 하고 있는 한 플로리스트.

<커피 농장의 하루> 겉그림
 <커피 농장의 하루> 겉그림
ⓒ 채륜서

관련사진보기

저자는 20여 년 전 어느 날 커피 한 잔을 마시고자 우연히 들른 한 커피 집에 걸려 있는 액자 속 하얀 커피 꽃에 매료되어 커피 공부를 시작한다. 커피를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갈증은 좋은 생두를 만나는 것. 그리하여 어느 날 무작정 필리핀으로 가서 터를 잡고 커피나무를 심는다.

이 책은 이런 저자가 지난 10여 년 동안 커피 농장을 하면서 만났던 커피나무 한그루의 성장 과정과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송알송알 맺힌 작디작은 초록 열매들이 붉게 익어 정제 후 생두가 되기까지 그 과정과 커피나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글과 사진으로 엮었다.

심은 후 몇 년이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과실수들처럼 커피나무도 금방 열매를 맺지 않는다. 싹을 틔운 지 5년이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사람들에 의해 재배되는 커피나무와 달리 야생의 커피는 3년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단다.

야생의 커피나무가 더 빨리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도 있다. 오래된 야생 커피나무를 잘라낸 후 그 둥치(그루터기)에서 새가지가 나기를 기다리는 것. 이렇게 하면 1년 만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단다. 굵게 자란 야생커피나무 둥치의 뿌리는 많은 양분을 토양으로부터 빨아들여 새로 난 가지에 충분한 영양분을 주기 때문이란다.

커피나무와 함께 자라는 것은 바나나나무다. 커피나무는 적당한 그늘이 있어야 잘 자라는데 바나나나무의 넓은 잎사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지라 커피 농장에서는 바나나나무를 먼저 심고 그 옆에 커피나무를 심는다. 바나나 꽃은 붉은색, 가끔은 한 나무에 100개가 넘는 바나나가 열릴 때도 있다나.

어떤 체리가 로부스타고 어떤 체리가 아라비카일까? 사실 열매를 보고 품종을 구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센터라인의 모습이 다른 것이 보인다-책속 설명
 어떤 체리가 로부스타고 어떤 체리가 아라비카일까? 사실 열매를 보고 품종을 구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센터라인의 모습이 다른 것이 보인다-책속 설명
ⓒ 채륜서

관련사진보기


배고픈 사향 고양이가 정글을 헤맨다. 커피 열매 익는 냄새가 난다. 야생 커피나무는 높이가 7~8미터나 되지만, 사향 고양이는 나무도 잘 탄다. 나무에 올라가 잘 익은 커피 열매를 실컷 먹고는 아무 곳에나 변을 본다. 이렇게 루왁 커피가 만들어진다.

필리핀에는 130종정도의 박쥐가 살고 있다. 그중 밤색의 과일박쥐는 커피 열매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과일박쥐는 소화기관이 짧고 가느다랗기 때문에 커피콩을 삼킬 수 없다. 그래서 커피 열매의 과육만 먹고 껍질과 콩은 뱉어 버린다. 박쥐는 한밤중에 커피 열매를 먹는다. 박쥐는 냄새를 맡아서 완전히 익은 커피 열매를 가려내 먹는다. 그러므로 박쥐가 골라 먹고 뱉어낸 커피콩은 맛있는 커피콩인 것이다. - <커피 농장의 하루>에서

이제까지 커피 열매는 쓰디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탕을 전혀 타지 않은 진한 블랙커피처럼. 하지만 우리가 한 잔의 커피로 마시는 원두 부분은 커피 열매의 과육을 벗겨낸 그 속 알맹이. 벗겨내 버리는 커피 열매 과육은 달콤하기 때문에 이처럼 사향고양이나 과일박쥐를 비롯하여 수많은 곤충들의 먹잇감이 된단다. 

동물이나 곤충들만 커피열매 과육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열매의 과육만 노리는 이들 동물이나 커피의 배꼽으로 들어가 과육을 파먹는 곤충들처럼 커피 과육의 달콤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과육이나 껍질에도 카페인 성분이 있어서 많이 먹을 경우 카페인에 중독된단다.

<커피 농장의 하루>는 이처럼 커피나무 한 그루, 커피 열매 한 알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커피의 꽃
 커피의 꽃
ⓒ 채륜서

관련사진보기


커피꽃
 커피꽃
ⓒ 채륜서

관련사진보기


커피를 좋아하는 편인지라 커피의 역사와 세계 각지로의 전파 과정을 담은 <커피 견문록>,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어 어떤 변화를 거쳐 일상의 음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공정무역 커피 생산 현지 이야기인 <히말라야 커피로드>, 우리나라 맛있는 커피집들을 소개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15잔> 등 그동안 커피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읽은 여러 권의 커피 관련 책 중 가장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이 전하는 커피 관련 짧은 이야기와 풍성한 사진들은 저자가 마치 이제까지 나온 책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위주로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그간 여타의 책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야생의 커피를 다루는 것도 신선하다.

커피를 좋아해 즐겨 마시면서 왜 한 번도 커피 꽃의 존재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커피 꽃에선 어떤 향이 날까? 종류마다 다른 향이 날까? 커피의 꽃이 여러 가지인 만큼 과육도 여러 가지의 맛이 난단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난히 달기만 한 과육이 있는가 하면 재미있게도 처음은 달지만 끝으로 가면서 청국장 맛이 나는 과육도 있다나.

청국장 맛이 나는 과육을 가진 커피 열매를 정제해 볶으면 어떤 커피 맛이 날까? 오늘 내가 마신 커피는 어떤 모양의 꽃잎을 피웠었던 걸까? 어떤 공기와 어떤 이슬을 머금고 자란 커피 열매였을까? 커피 맛에만 끌려 마시곤 하던 커피 한 잔에 스며있는 것들을, 커피의 속살을 맘껏 궁금해 하고, 그리고 느끼게 해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커피 농장의 하루>ㅣ저자 : 윤 야미니ㅣ채륜서ㅣ2011.10 ㅣ 값:11000



커피 농장의 하루 - 커피, 플로리스트를 만나다

윤 야미니 지음, 채륜서(2011)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