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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운성씨.
 조각가 김운성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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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지난 1991년 1월 8일 이래 20년 동안 이어져온 정신대 할머니들의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가 14일로 꼭 1000회를 맞는다.

이날 서울뿐 아니라 일본, 미국, 독일 등 전 세계 9개국 37개 도시에서도 정신대 문제 해결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국제 연대 집회가 개최된다.

이날 수요시위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것은 1000번째라는 의미 외에 평화비 제막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복을 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소녀 모습의 평화비는 올해 초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가 시민모금을 통해 제작을 해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정문 건너편에 세워질 평화비는 할머니들이 지난 20년간 끈질기게 시위를 이어 온 바로 그 장소에 들어선다. "20년 '수요시위'의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후손에게 남겨주겠다"는 것이 정대협의 건립 취지다.

평화비 설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은 바로 일본 정부. 정신대 문제에 대해 그동안 침묵과 무대응으로 일관해 온 일본 정부는 '평화비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설치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8일에는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이 "평화비 설치가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줘선 안 된다"며 "비 설치를 중단시켜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대협은 예정대로 평화비 제막식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알려졌던 정신대 피해 할머니 234명 중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 이제 63명이 남아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만 시간은 결코 일본 편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평화비는 조각가 김운성(47), 김서경(46) 부부 공동작업을 통해 태어났다. 김운성씨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영원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했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효자동 갤러리 '아트가'에서 그를 만나 평화비 제막에 대한 심경을 들어보았다.

다음은 김운성씨와 나눈 일문일답.

"반성과 사과 못할 망정 평화비 세우지 말라는 일본 정부... 열 받아!"

조각가 김운성씨.
 조각가 김운성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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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소속 작가로 활동하면서 사회참여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평화비 제작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난 20년 동안 할머니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항상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는데, 올 해 초 정대협을 찾아갔었다. 미술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물어보았는데, 올해가 수요시위를 시작한 지 20년, 횟수로는 1000회를 맞는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비석 얘기가 나왔는데, 비석보다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으로 구상을 해보겠다고 했다. 구상이 완성된 후 본격적인 작품 제작에는 넉 달이 걸렸다."

- 평화비가 의자에 앉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애초에는 할머니들이 매주 시위를 하고 계신 그 장소에 '고무신을 놓을까', '빈 의자를 놓을까', '꽃을 놓을까'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오다가 의자에 앉은 소녀의 모습으로 완성이 되었다. 한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셨을 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지만 끌려갈 당시에는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인지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끔찍한 고통과 상처를 고스란히 받았던 것은 어린 나이의 소녀들이었다. 그래서 소녀상을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놓고 '너희들이 한 짓을 똑똑히 봐야 한다'라고 증거하는 의미가 있었다.

할머니들이 지금 투쟁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고발하는 의미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소녀의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죽은 이와 산 이를 연결해주는 영매를 상징한다. 그동안 많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살아계신 할머니들을 이어주는 역할이다. 또 의자에 앉은 소녀의 그림자는 현재의 할머니 모습인데, 할머니의 가슴에는 환생을 의미하는 나비가 한 마리 앉아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위안부문제는 과거에 일어났지만 현재이고, 현재이면서도 과거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할머니들이 세상을 다 떠나시더라도 평화비는 할머니들이 시위하던 장소에 남아 역사를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 창작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느꼈던 특별한 감회 같은 것이 있었다면.
"처음에 구상할 때 소녀의 모습은 순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는데, 제작을 하다 보니 내가 열을 받게 되더라. 할머니들이 그 어린 나이에 끌려갔던 것을 생각하면…(감정이 북받친 김씨는 목이 메었다). 자꾸 화도 나고 분노가 생기고, 작업을 하면서 계속 그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처음에는 다소곳하게 놓여 있던 소녀의 손이 점점 주먹을 쥐게 되고, 맨발에 뒤꿈치를 든,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는 그런 아픔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도 사실은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반성과 사과는 못할망정 평화비를 세우지 말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요구하는 일본 정부를 보면서 열 받고 있다. 우리 정부는 또 뭔가. 지금까지도 한국 정부가 제대로 목소리도 못내는 것을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온다."

- 부부 공동작업으로 평화비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창작과정에서 의견 차이 같은 것은 없었나.
"아내가 워낙 이 작품에 대해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힘든 일만 시키고 손도 못 대게 했다(웃음). 나도 그게 맞다고 봤다. 이 작품에는 여성의 섬세한 감성이 필요한데, 내가 하면 어쩐지 우락부락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적극적 개입은 못하고 발이나 손, 옷주름 같은 소소한 부분을 만들었다. 수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도 만들어 봤다가, 저렇게도 만들어 봤다가 하면서 그 중 좋은 것을 골랐으니 의견 차이는 그렇게 해소했다."

김씨는 '할머니들이 평화비를 이렇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할머니들 얘기가 나오면 너무 괴로워서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들께서 잠시라도 웃어주셨으면 해서 대신 작은 작품을 만들었다"며 갤러리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일본군 모자를 쓴 벌거숭이 남성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이 작품에는 '죄송합니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태그:#수요시위, #평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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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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