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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용담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42호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 용담사 석불입상 남원 용담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42호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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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다. 827년 신라말기의 고승으로 태어나 89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들 모두 풍수에 기안하여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모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도선국사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이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전설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머리위에는 육계가 솟아있고, 귀는 어깨에 닿았다. 고려 초기의 석불이다
▲ 석불입상 머리위에는 육계가 솟아있고, 귀는 어깨에 닿았다. 고려 초기의 석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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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과 광배를 한 돌에 새겨넣었다. 고려 초의 거대석불이다
▲ 석불입상 석불과 광배를 한 돌에 새겨넣었다. 고려 초의 거대석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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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돌은 자연석 위를 둥그렇게 돋아 구 위에 석불을 올렸다
▲ 받침돌 받침돌은 자연석 위를 둥그렇게 돋아 구 위에 석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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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주천면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 도로 좌측을 보면 용담사라는 절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용담사가 언제 지어진 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적혀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양편 어께 부근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그러나 그 높이가 일정치가 않다.
▲ 어깨 양편 어께 부근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그러나 그 높이가 일정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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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돌의 양편에도 구멍이 있다. 기둥을 새웠던 흔적인 듯하다
▲ 받침돌 받침돌의 양편에도 구멍이 있다. 기둥을 새웠던 흔적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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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서 천년 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에 대한 설명은 좀 달랐다.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여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절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다니, 이것은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때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석불입상 뒤편에 조각난 돌이 보인다. 광배에서 떨어진 조각은 아닌지
▲ 문양 석불입상 뒤편에 조각난 돌이 보인다. 광배에서 떨어진 조각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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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입상 앞에 세워놓은 잘못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판. 속히 철거를 해야 할 듯
▲ 안내판 석불입상 앞에 세워놓은 잘못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판. 속히 철거를 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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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다. 머리 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이 훼손돼 그 형태만 추정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는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고치거나 철거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티스토리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석불입상의 답사는 11월 4일에 하였습니다.



태그:#석불입상, #고려, #용담사, #남원,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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