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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사고가 난 북아현 재개발 지역 상가의 철거가 시작되기 전 모습
 지난 주 사고가 난 북아현 재개발 지역 상가의 철거가 시작되기 전 모습
ⓒ 출처: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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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재개발의 무리한 공사진행으로 상가세입자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금요일이던 지난 11월 11일 오전, 서대문구 북아현동 1-3구역 상가세입자 박선희(47세)씨는 이틀 전 용역들에게 명도당한 자신의 가게 안에서, 개발조합과 시공사의 포크레인이 부순 벽에서 밀려온 자재더미에 쓸려 다리에 대못이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보상협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사만을 진행하려는 시공사 업체와 조합이 빚어낸 사고였다.

부상을 당한 가게 주인 박선희씨를 병원에서 만나, 사고 당시의 이야기와 가게를 꾸려온 이야기를 들었다.

쓰레기와 깨진 유리조각이 나뒹구는 가게에서 이틀 밤 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덩이들과 흙더미가 가게 안으로


기자: 강제집행이 진행된 수요일 상황과 폭행을 당한 금요일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박선희(이하 '박'): 보통 새벽에 가게 문을 닫아요. 화요일 새벽 4시 반에 가게를 정리하고 들어갔는데, 다음 날 오전 10시 반 쯤에 전화가 왔어요. '가게에 용역들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부랴부랴 달려가 봤더니 용역들이 집기들을 들어내고 있었어요. 집기를 들어내고, 의자며 식탁들을 내놓으면서 유리창도 부쉈어요. 그리고 식당 바닥에 쓰레기를 모아다 버리고, 앉지 못하게 물을 흥건하게 부었어요. 첫 날에는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앉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어요. 다음날이 되니까, 물이 말라가면서 그래도 좀 낫더라고요.

이불도 없이, 유리조각이며 쓰레기가 뒹굴며 냄새나는 찬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이틀 밤을 보냈어요. 용역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으면서 외부인들이 들어오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게 하고, 음식조차 들여보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게 이틀 밤을 보내고, 금요일 오전 11시 경, (상가세입자비상대책위 소속 회원) 남자들이 모두 판사님이 중재를 하시겠다고 마련한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에 간 사이에, 한 남자가 오더니 '조합에서 나왔다. 따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며 가게 밖으로 불렀어요. 저는 나가지 않고 안에서 '대책위 회원들 없이 혼자서 단독으로 협상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뒷벽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더니 돌덩이들과 흙더미가 가게 안으로 쓸려들어 왔어요.

저는 가게 앞에 철거를 위해 설치된 쇠파이프를 붙들고 밖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주저앉아 바닥에 가로로 설치된 또 다른 쇠파이프에 두 다리를 버티고 앉았어요. 남편도 없는데, 이대로 떠밀려 가면 용역들이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순간 벽이 무너지면서 떠밀려 온 내부 자재들과 붙들고 있던 쇠파이프 사이에 다리가 끼였고, 내부 인테리어에 붙어있던 녹슨 쇠대못이 제 다리에 박혔어요. 저는 '다리가 끼였다'고 소리를 쳤지만, 용역들은 제 어깨를 붙잡고 '엄살 부리지 말라'며 그저 저를 가게 밖으로 끌어내려고만 했어요. 다리에 쇠못이 박히고 부서진 자재와 쇠파이프 사이에 다리가 끼여 있는 상태로 아파서 계속 소리를 지르자, 동생들이 달려와 틈을 만들어 다리를 빼주고 못도 다리에서 뺏어요. 그 후 저는 온 몸에 힘이 없고 실신한 것처럼 자리에 쓰러졌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어 그저 가게 앞에 누워만 있었어요.

이 후론 기억이 잘 안나요. 온 몸에 기가 다 빠져버린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저 누워있는 제 눈앞에 서있는 사람들의 다리들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어요.

사고 다음 날 병원에서 만난 박선희씨.
 사고 다음 날 병원에서 만난 박선희씨.
ⓒ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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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식당을 하다 묻을 닫고 어렵게 시작한 곱창집
일 년에 모두 합해 평균 육일 정도 쉬어


기자: 강제철거 있고 나서, 부서진 가게 안에서 작성해 서대문구청에 올린 글에 보면, 남편의 사업부도 이후, 어렵게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마련한 가게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곱창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 주세요. 또, 이웃분들이 곱창집이 아니라 장어집이라고도 하시던데요.

박: 곱창가게를 한 지는 6년이 되었어요. 체인점이예요. 처음에는 남편의 누님이 식당을 하셔서, 함께 해보자고 하여, 경험도 없는 사람이 너무 큰 규모로 장어식당을 시작했어요. 결국 큰 손해를 입고 6년 만에 정리를 했지요. 어렵게 다시 시작한 것이 곱창체인점이었어요. 양념이며, 곱창이며 재료를 준비해 대 주니까, 시작하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차츰 안정되어가자, 조금 욕심을 냈죠. 남편이 부도 이후 남의 식당에서 들어가 일하면서 배운 장어구이 요리기술을 이용해 체인점에 양해를 구하고 장어도 함께 조금씩 팔기 시작했어요. 활어를 갖다가 파는 곳도 드물고, 가격을 저렴하게 해서 파니까, 손님들이 좋아하셨어요. 간판에 장어를 넣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남편이 '그래도 원래 곱창구이 체인점이니까 고치지 말자'고 했어요.

그래서 더러는 곱창집이라고도 하고, 장어집이라고도 해요.

이곳에 곱창집을 시작한 이후로 일 년에 다해봐야 평균 6일 정도 쉬었어요. 오후 4시쯤 가게를 열면, 새벽 4시쯤에 닫는데, 저희 집은 일주일 내내 열어요. 구정 때 이틀, 신정 때 하루, 추석 때 이틀, 그리고 어쩌다 여름 휴가 하루. 그렇게 6년을 살았으니까, 지금까지 모두 합해야 36일, 한 달이 조금 넘네요.

남편이 먼저 식당을 열면 저는 오후 4시쯤 나가지요. 새벽에 들어오면, 남편은 잠을 자지만, 저는 아이들 아침 식사 준비하고, 등교시키고 나서 자요.

생물 장어를 잡는 것부터 요리까지 남편이 다해요. 저는 밑반찬 만드는 것 서빙하는 것을 하지요. 저는 징그러워서 장어는 손도 못 대요. 수족관에 생물장어들은 모두 머리를 위로 하고 서로 뭉쳐서 서 있어요. 꼭 매두사 같아요.(웃음)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식당을 시작했어요.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어릴 때 일을 시작해서, 제일 미안하죠.

부모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제일 걱정
부부가 가게일로 바빠 아이들은 동생이 돌봐


기자: 자녀분은 어떻게 되세요? 자녀분들이 어머니가 다치신 것을 알고 있나요? 

박: 고등학교 다니는 첫째 아들과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있어요. 다쳤지만 괜찮다고만 전화로 이야기 했어요. 엄마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가게 근처에는 오지 못하게 했어요. 또, 용역들이 아이들에게 해코지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엄마 아빠가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말했어요. 사춘기 때라 상처를 받을 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엄마 아빠가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거라고, 너희들도 스스로 소신껏 행동하면 된다'고 이야기 했어요. 아이들도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큰아이는 아빠에게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남편이 그러더군요.

아이들 학교가 모두 이 근처라 같은 학교 아이들로부터 '너희 부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까봐, 그것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그것이 제일 마음에 걸려요. (박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자: 엄마 아빠가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박: 저는 뉴타운재개발이 되면 학교가 높은 아파트들에 둘러싸여 학교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그 좋은 아파트에 누가 들어오겠어요? 지금 사는 사람들 말고, 부자들, 잘사는 사람들이 들어오겠죠. 그러면, 아무래도 학교 입장에서는 시설면에서 하나라도 더 혜택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 성적도 가정형편에 따라 높아진다고 하는데, 학교 성적도 우수해 질 거고, 학교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사하면서 같은 동네 사는 제 아래 동생이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챙겨줘서 지금껏 잘 컸어요. 항상 동생에게 고맙지요.

저는 이곳 북성초등학교 출신이예요. 이곳에서 쭉 컸고, 지금도 살고 있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일했는데, 신생 은행으로 옮기면서 너무 힘들어서 첫째를 임신하고는 그만 두었어요. 남편은 기계 공구 디자인 설계하는 일을 했어요.

다리에 박힌 대못 때문에 봉합수술을 한 상처.
 다리에 박힌 대못 때문에 봉합수술을 한 상처.
ⓒ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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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다 키우고 매일 안부 물으며 사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지역
답답한 임대아파트에서 매달 월세 내는 것도 어려워

기자: 동네 가게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딸 부잣집'이라고 하더군요. (기자 자신도 사건이 난 지역의 바로 옆 뉴타운재개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곳에 살고 있다.)

박: 저는 다섯 딸 중에 첫째예요. 둘째도 동네에서 같이 살고, 어머니도 셋째랑 함께 한 집에서 계속 살고 계세요. 이곳에서 사시면 다 아시겠지만, 이곳은 시골 같잖아요. 대부분 다 노인분들이 아이들 키워 보내고, 이웃 간에 문 다 열어놓고, 매일 얼굴보고 안부 묻고 그렇게 살고 계시잖아요. 그 분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세요. 그 분들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서 살 수 있겠어요. 그나마 낡고 작지만, 자신이 살아온 손때 묻은 자기 집에서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죠.

뉴타운재개발하면 임대주택 준다고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답답한 아파트에 사는 것도 고역이고, 매달 월세 내는 것도 별다른 소득없는 그 분들께는 큰 부담이어서 가는 것이 어렵지요.

기자: 저희 어머니도 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시자, 장사를 시작하셔서 아주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생계가 막막했던 마음에 또 억울한 마음에 어머니께서 여기저기 탄원서를 써서 보내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저희가 어렸을 때부터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공장에 매일 새벽부터 나가 일하시고, 남은 음식들을 갖고 오셔서 저희들을 챙기셨어요.

그때는 철이 없어서, '왜 우리 집은 이렇게 못 사느냐고, 왜 나는 대학도 못가느냐'고 힘드신 엄마에게 투정하기도 했었어요. 가끔 엄마에게 '그 때 그런 일도 있었어' 하면, '그래? 난 기억 안 나는데?' 하시며 모른 척 하세요. 직접 부모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나 어머니께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 문제가 알려져서, 뉴타운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다른 지역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협조하고 싶어요. 제가 겪고 있는 이 문제는 다른 세입자분들께도 다 마찬가지 일 테니까요.

박씨가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모습을 주변상인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박씨가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모습을 주변상인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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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내가 살고 있는 구역도 뉴타운 재개발 북아현3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까지는 인가가 나기는 했지만, 조건을 붙인 인가라고 한다. 서대문구청장이 '감정평가 내용을 먼저 공개하고, 분양을 받아 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충족될 때에만 최종인가를 승인하는 것'으로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뉴타운식의 재개발를 원하지 않는 집을 가진 분들이 이 소식을 알리고 다른 집주인 분들께 분양을 하지 말 것을 알려 나가고 있다.)

매일 마을버스를 타고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러 가는 길에 재개발 구역에 몇 안 남은 가게들의 점포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든든하고, '하나라도 더 팔아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곱창집 간판에는 언제나 불이 훤하게 켜있고 식당에는 항상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항상 가슴 한 켠이 뿌듯했었다.

지난 주 수요일 오전, 동네 가게에 갔는데, '재개발 지역에 남은 식당에 지금 용역들이 들어왔다'며, 가게에서 일하는 분이 알려 주었다.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었지만, 약속된 일정이 있어 갈 수 없었고, 다음날 가 보았더니, 전날 까지 멀쩡하던 식당이 무참히도 부서졌고, 안에는 노모 한 분이 서계시고,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앉아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틀 뒤 금요일 오전, 다시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가는 길. 아현역에 내려 병원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식당 앞 길 위에 쓰러져 있고, 식당 뒷벽이 허물어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동네 상가 세입자분들이 서서 조합인지 시공사 인지 사복차림의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옆집 여성복 가게 아주머니가 이 사태를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복 차림의 사람이 아주머니의 스마트 폰을 빼앗아 길에 내동댕이 치려던 순간,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길 건너에는 경찰차 두 세 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경찰들은 그저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고, 알 수 없는 얼굴의 사복차림의 사람들도 무리지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렇게 그 곳에 서 있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달려 왔다. 취재기자며, 민주노동당 서대문 위원장도 도착했다. 그렇게 두 세 시간 정도 서 있은 후에야 길 위에 쓰러져 있던 박씨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응급구조차에 싣는 과정에서도 부상을 입은 박씨는 온 몸에 통증을 많이 느끼고 있는 듯 몸을 쉽게 가눌 수 없었고, 연신 신음소리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옆집에서 시계방을 하는 아저씨는 '평소 친절하고 부지런해서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집이었다'고 설명했다.

어제부터 밤에 바람이 많이 불고 기온도 많이 내려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상가세입자 대책위 소속 회원들은 장어집 앞 도로변 한 켠에 작은 파라솔을 갖다놓고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노숙을 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다. 구청에 멸실신고도 하지 않은 채 가게 벽을 부순 시공업체와 조합은 월요일에는 장어집에 있는 건물 안의 내부자재를 계속해서 부쉈고, 옆 건물에 있는 시계집과 서점이 사용하고 있는 전화선마저 잘랐다.

우리 가족도 아현동에 살다가 재개발이 되면서 결국 북아현동으로 쫓겨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늦게까지 남아있던 집 중의 하나였다. 지난 주 목격한 일들로 인해 아현동 골몰골목 열심히 살아가던 작은 영세 상인들의 모습들, 지금 살고 있는 북아현동처럼 시골동네 같았던 그 곳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던 이웃들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언제부터인가 '나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나가야겠지. 다음은 경기도 어디쯤으로 가야할까'하는 체념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데,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다친 몸으로 바닥에 쓰러져서도 삶의 터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던 선희씨의 웅크린 채 누워있던 모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런 선희씨에게 이웃들이 주는 격려와 도움을 보면서, 마음 한 켠에 '그래, 나도 여기서 살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사고가 난 후 부직포가 쳐진 자신의 가게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씨와 남편.
 사고가 난 후 부직포가 쳐진 자신의 가게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씨와 남편.
ⓒ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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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박선희씨가 부서진 가게 안에서 작성해 서대문구청에 보낸 글이다

2006년 하던 사업이 망하여 하루하루 절망으로 살던 저에게 부모 형제가 돈을 빌려주어 겨우 자리를 마련하여 이 가게를 구하였습니다. 그 가게를 살리기 위해 전 어린 자녀까지 맡겨두며 열심히 살았고 근5년간 하루 5시간 이상 자본 적도 없습니다. 작은 가게에서 푼돈이나마 자식을 키우며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는 데 재개발을 명목으로 그 작은 돈을 주며 나가라는데 도대체 어디 가서 그 돈으로 가게를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설상가상으로 공사지연 책임을 물어 벌금을 내라고 하는데 한 두 푼도 아니고 멀쩡한 가게 보상금으로 준다하여 놓고 그 이상의 돈을 공사지연금으로 달라고 하니 저희 가족의 희망이던 가게까지 빼앗아 놓고 터전인 집까지 빼앗아 가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재개발이란 말입니까? 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시민을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내모는 것인지 정말 답답합니다. 늙으신 노모와 형제들도 잠도 못 자고 추운 바닥에서 울고 있습니다. 저 하나 살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제 가족과 어린 자식들이 굶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법 하나 어기지 않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박씨는 명도가 들어간 지난 9일 이후 이틀동안 부서진 가제 안에서 이불도 없이 이틀을 지냈다.
 박씨는 명도가 들어간 지난 9일 이후 이틀동안 부서진 가제 안에서 이불도 없이 이틀을 지냈다.
ⓒ 사진 제공: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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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명도가 들어간 가게 안 모습.
 지난 9일 명도가 들어간 가게 안 모습.
ⓒ 사진 제공: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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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뉴타운, #재개발, #북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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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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