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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을 위한 3일간, 할로윈 데이, 뚜상 그리고 만령절

10월 25일. 수업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데 교수님이 급히 "다음주 화요일은 쉬는 날이라서 수업 없어요"라고 한다. 우선 수업이 없다는 말에 신이 났지만 무슨 휴일인지 궁금해진다.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뚜상, Toussaint, 만성절, 萬聖節)'이다. 파리4대학은 개학을 10월 초에 늦게 시작한 터라 그날 당일만 쉬지만 9월 초에 개강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모든 성인의 날이 포함된 일주일을 쉬다. 학생들은 이때에 서로 "방학 때 뭐할 거야?" 물어보면서 학기후의 여행계획을 세우기 바쁘다.

파리 출신이 아닌 친구들은 가족들을 방문하거나, 교환학생들은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 유럽의 곳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그 정도로 화끈한 방학은 아니지만 하루 휴일이 있다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모든 성인의 날 전날인 10월31일은 할로윈데이(Halloween Day)이다. 프랑스에서는 미국처럼 할로윈 문화가 깊이 정착한 건 아니지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분장을 하고 즐길 수 있는 파티가 많이 열린다. 할로윈 며칠 전에 친구들과 함께 간 볼링장에서는 거미줄과 해골들로 맛깔나게 장식을 해놔서 조금이나마 할로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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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리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이곳에 묻히다

'모든 성인의 날'은 가톨릭 축일로서 교회가 지정한 성인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성인들도 다 같이 기념하는 날이다. 죽은 이들을 추도하는 날은 그 다음날인 11월 2일에 '위령의 날(만령절 萬靈節)'로 따로 정해져 있지만 프랑스에선 보통 휴일인 모든 성인의 날에 돌아가신 조상이나 친척의 무덤에 꽃을 바치곤 한다.

꽃 한 송이 오른손에 쥐고 죽은 자를 찾아가고 있는 페르라세즈 공동묘지 입구의 풍경
 꽃 한 송이 오른손에 쥐고 죽은 자를 찾아가고 있는 페르라세즈 공동묘지 입구의 풍경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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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서울 면적의 6분의1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공동묘지가 14개나 있다. 서울에는 3곳이 있는 것에 비하면 정말 많다. 그 공동묘지 중에서도 단연 20구에 있는 페르라세즈 공동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는 유명하다. 파리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이기도 한 이곳은 그 크기만큼 많은 유명 인사들이 묻혀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그녀의 일생을 그린 영화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그룹 the doors의 멤버로 활동한 미국의 가수이자 시인인 짐 모리슨(Jim Morrison),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여기에 묻혀있다.

페르라세즈 공동묘지는 내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2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이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아직 가보지 못했었다. 모든 성인의 날을 맞아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평소와는 달리 오늘 따라 Père-Lachaise의 지하철역이 북적인다. 매년 이날마다 외국에서 까지 꽃을 바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날씨가 조금 을씨년스러워서 공동묘지에 가면 오싹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웬걸 입구부터 늘어져 있는 꽃집들의 꽃을 보니 화려하기까지 하다.

죽은 자가 죽은 나뭇잎을 덮고 있다.
 죽은 자가 죽은 나뭇잎을 덮고 있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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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내부도 오늘을 위해 예쁜 꽃들로 가득 장식이 되어있고, 노란색, 빨간색 떨어지는 낙엽들이 운치 있다. 내부가 워낙 크기 때문에 입구만 해도 여러 곳이 된다. 입구로 들어가니 먼저 납골당이 보인다. 꽃을 헌정하고 묵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몇 년-몇 년 누구누구 여기에 묻힘' 이란 짧은 글 귀로된 정리된 한 사람의 인생.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한 문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정리될 수 있을까. 그 안에 담긴 사연과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는 묵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죽은 자를 만나면서 살아있는 나를 다시 만나다

앞으로 더 나아가니 묘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제각각 크기도 모양도 다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묘비가 있는 반면에 조각상이나 작품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묘비들까지 디자인도 다양하다. 개인의 묘비도 있지만 가족의 묘비가 많다.

소박하고 단순한 묘비와 호화스러운 장식의 여러 묘비들을 보니 우리는 죽어서도 묘비의 크기와 화려함으로 판단되는 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것도 잠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평범하지만 정성스럽게 닦여있고, 활짝 피어있는 꽃들과 촛불이 놓여있는 묘비들이 있는 반면 크고 화려하지만 몇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는지 두꺼운 이끼가 꽃을 대신하고 있는 묘비들도 있다. 이런 묘비들은, 묘비위에 떨어진 낙엽조차 처연해 보인다.

죽은 자도 그 묘지의 화려함으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가. 아니다. 묘비의 화려함은 사실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가 죽은자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드러내기위한 산자의 행위이다.
 죽은 자도 그 묘지의 화려함으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가. 아니다. 묘비의 화려함은 사실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가 죽은자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드러내기위한 산자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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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안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높은 직위로 화려하게 살았나 보다는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소중한 관계를 만들며 살았느냐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이 다양한 묘비들의 현재 모습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관계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의 인생을 기억해줄 것이다. 한 줌의 재가 되고 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이는 그리움의 질량, 딱 그것만큼이 그가 세상을 산 보람일 것이다.
공동묘지 산책, 산 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철학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공동묘지 산책, 산 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철학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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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서 산책한다는 것이 조금은 오싹할 수 도 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묘비들을 처음 본 순간의 "우아 여기 정말 크다."라는 생각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이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았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닳게 된다. 여기에 모셔진 모든 묘비의 주인은 한 때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 오늘 이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공동묘지는 죽은 자를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을 만나게 한다.
 공동묘지는 죽은 자를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을 만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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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는 출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넓다.
 공동묘지는 출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넓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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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있는 지도 몰랐는데 주위를 보니 벌써 어둠이 시작되었다. 나는 묘지의 안쪽에서 출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옆 사람들에게 출구를 물었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 사람도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그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마침내 출구로 나왔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지도 한 장 있었으면 싶다. 오리무중 인생의 어디쯤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쫙 펴볼 수 있는 인생의 지도 한 장.

나오는 길에 제법 세게 부는 바람에 입은 코드를 단단히 여미었다. 짙어진 파리의 가을이 낙엽을 허공으로 흩날리게 한다. 땅에는 죽은 나뭇잎, 즉 낙엽들이 쌓여갔다. 가을 한 자락에 부는 바람은 세찼지만 이날 나의 마음은 한껏 덥혀졌다. 나는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서 죽은 자를 만나면서 살아있는 나를 다시 만났다.

파리는 지금, 낙엽의 계절이다. 낙엽은 죽은 나뭇잎이다. 산 것은 모두 죽는다.
 파리는 지금, 낙엽의 계절이다. 낙엽은 죽은 나뭇잎이다. 산 것은 모두 죽는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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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들은 죽음을 기억해야한다는 명제가 더욱 뚜렷해졌다. 언젠가는 죽음과 만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살기위해서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



태그:#페르라세즈 공동묘지, #파리, #만성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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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행복한 만큼 다른사람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계의 모든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계에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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