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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고도 바쓰(Bath)에서 로만 바쓰(Roman Baths)와 함께 도시의 품격을 상징하는 곳은 바쓰 사원(Bath Abbey)이다. 영국 내에서도 바쓰 사원을 빼고는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바쓰 사원은 역사적 위치가 높은 곳이다. 게다가 바쓰 사원은 영국의 중세 사원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바쓰 사원은 로만 바쓰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구시가의 중심 광장에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어서 굳이 사원 가는 길을 찾으려고 어렵게 노력할 필요도 없다. 세월의 연륜이 쌓여 거뭇거뭇한 우유빛 석재 건축물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의 첫 번째 왕이 대관식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바쓰 사원. 영국의 첫 번째 왕이 대관식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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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쓰 사원에 입장료는 따로 없지만 사원 입구에서 기부금 형식으로 2파운드 정도를 받는다. 기분이 왠지 편치 않은 것은 사원 입구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블로그에서 본 대로 바쓰 사원의 출구로 사용되는 기념품 가게 쪽으로 갔다. 기념품 가게 쪽으로 들어가면 돈을 내지 않고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원의 기념품을 구경하며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역사적 유산에 대한 답사는 우선 역사적 내력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쓰 사원도 천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하였다. 757년, 최초로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당시 바다를 건너 와 영국을 정복한 앵글로 색슨 족이었다. 973년에는 이곳에서 잉글랜드의 7개 나라를 통일한 웨식스(Wessex) 국 국왕의 대관식이 행해졌으니, 바쓰 사원은 통일 영국의 첫 번째 왕이 대관식을 한 곳으로써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바쓰 사원은 영국을 침략한 또 다른 정복자,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andie) 공(公) 윌리엄 1세(William I)에 의해 1066년에 헐렸지만 1090년에 다시 노르만 인들에 의해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다. 1499년에 다시 고딕양식으로 건설되었던 바쓰 사원은 헨리 8세(Henry VIII)가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성공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다시 파괴된다. 현재의 바쓰 사원은 다시 수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엘리자베스 여왕 1세(Elizabeth I)에 의해 복구가 시작되었고 제임스 1세(James I) 당시인 1616년에 다시 세워졌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시원스럽다.
▲ 바쓰 사원 내부.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시원스럽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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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의 첫 느낌은 성당 내부가 크고 시원스럽다는 점이다. 나는 가장 먼저 얼굴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자작나무의 수많은 줄기 같은 장식이 건물의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섬세한 천장 조각은 부채꼴 모양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기둥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햇빛은 성당 내부를 신비롭게 비추고 있었다.

우아한 천장의 곡선은 수직으로 뻗어나간 고딕 양식의 기둥이 연결하고 있었다. 67m 높이에 이르는 아이보리 빛의 기둥은 마치 천년 역사를 품은 소나무처럼 쭉쭉 뻗어 있다. 사원 내부의 기둥 장식 하나 하나는 수십 년 세월의 정성의 손길이 담겨 있다.

부채꼴 모양의 장식이 섬세하다.
▲ 사원 천장. 부채꼴 모양의 장식이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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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 사원의 예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예배는 죽은 자들을 기리는 예배였다. 한 미치광이의 집단 학살로 인해 허망하게 죽어간 노르웨이의 청소년들을 기리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의 사원 내부는 숨 죽일 듯이 고요했다. 이유 없이 죽어간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기도는 숙연함 속에 있었다.

노르웨이 참사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 바쓰 사원 예배. 노르웨이 참사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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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연함 속에서도 사원 내부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사원의 수많은 창을 장식하는 화려함의 극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쓰 사원은 석재보다 유리가 더 많이 쓰였다고 할 정도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한 사원이다. 직접 와서 보니 그 말이 전혀 과장은 아니었다. 바쓰 사원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통과시키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구약성서와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 스테인드 글라스. 구약성서와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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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서쪽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구약성경이 있고, 고개를 돌려 보면 56가지 모습으로 다양하게 묘사된 예수가 스테인드 글라스 안에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상단의 총천연색 유리  위에는 바쓰 주변의 각 가문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문장(紋章)이 있다. 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높은 예술성 위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아내와 신영이는 작은 양초에 촛불을 켰다. 신영이와 아내는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나는 중학생이 된 신영이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물어 보았지만 신영이는 아빠에게 소원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어린 딸이 이제는 아빠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생겨가는 것 같다. 나는 두 손 모아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우리 가족은 양초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
▲ 기도실. 우리 가족은 양초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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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기념품 가게로 나오면서 바쓰 사원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사자고 했다. 사원 입장료 격인 기부금을 내지 않았으니 기념품이라도 사기로 했다. 나는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라 사원의 기념품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신영이가 집어든 서양식 작은 종을 하나 샀다. 바쓰 사원을 상징하는 작은 종이었다. 내가 손으로 종을 움직이자 종은 투명한 소리를 울렸다.

사원 밖으로 나와서 보니 바쓰 사원의 상징물은 사원 밖에 있었다. 사원 입구의 양 벽면에  날개 달린 천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다른 성당이나 교회에서 보는 천사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천사들이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천사들이 멀쩡한 날개를 두고 사다리를 이용해 힘 들여서 하늘로 오르고 있을까?

주교의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다.
▲ 사다리를 오르는 천사. 주교의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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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외벽에 부조된 이 천사들은 한 인간의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었다. 현재 사원 건물의 골격을 짓기 시작한 1499년 당시, 올리버 킹(Oliver King) 주교는 한 꿈을 꾸게 된다. 그는 꿈 속에서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이 모습이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꿈 속에서 하느님이 지시한 모습 그대로 천사들을 재현한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성당과 사원을 봐 왔지만 건물 전면 외벽에 이렇게 개성 있는 조각을 남긴 사원은 이곳에서 처음 본다. 당시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기 전의 영국 가톨릭이 타락하여 주교가 말 하는 데로 말도 안 되는 조각을 남긴 것인지, 아니면 당시 사람들이 주교의 꿈을 사원 조각에 남길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원의 특별한 천사 조각상 속에 당시 영국인들의 여유와 유머가 담겨 있다고 믿고 싶었다.

천사들의 수를 세어보니 천사들은 양쪽에 7명씩 총 14명이나 된다. 좁고 긴 사다리를 딛고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천사들의 얼굴에는 신중함과 함께 평안한 안식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내가 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저렇게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정말로 오른다면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들은 어떨까?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사들은 사다리에서 떨어져도 날개가 있으니 다시 날아오르면 될 것이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천사의 모습이다.
▲ 사다리를 내려오는 천사.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천사의 모습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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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천사들인데 자세히 보니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는 천사가 따로 있다. 사다리 중간에 거꾸로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천사가 있었던 것이다.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사실은 이 천사가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천사일 것이라는 점이다.
바닥으로 내려오는 천사는 그림자가 얼굴을 더욱 어둡게 가리고 있다. 그림자에 가린 얼굴은 마치 상심에 가득 찬 얼굴같이 보인다. 게다가 하루도 쉬지 않고 물구나무 서듯 사다리를 타고 있으니 타락한 천사는 무척 힘이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희망의 상징인 천사들을 이렇게 고생시켜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천사가 가득한 사원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서 가이드의 안내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은 사원 앞 광장에 자리를 잡고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광장에는 신과 천사,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한가하게 바쓰의 거리를 다시 걸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 #바쓰, #바쓰 사원, #천사,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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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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