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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침묵

지난 8월, 오랜만에 뵌 장인어른은 의기소침해 보이셨다. 으레 내가 처갓집에 가면 반가운 사위를 붙들고 자신의 농사일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를 이어가실 당신이었건만, 이번만은 이상하게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 같았으면 불같이 화내셨을 딸자식의 바가지도 묵묵히 듣고 있으시던 장인어른.

그 이유는 처갓집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자연스럽게 풀렸다. 장인어른의 자존심이었던 소 축사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소 50여 마리가 기거하던 축사 2동 중 1동이 텅 비어 있었고 나머지 1동에도 남은 소라곤 15~6마리가 전부였다. 우리 까꿍이가 보기만 하면 짚 풀을 주려고 열광하던 그 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추석을 맞아 다 팔린 걸까? 소 경기가 그리 좋을 리가 없는데?

타들어가는 농심(農心)
▲ 텅 빈 축사 타들어가는 농심(農心)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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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 이후 장인어른 대신 실질적으로 소를 키우고 계신 장모님께 그 연유를 물어보니 장모님은 한숨부터 쉬셨다.

"소를 계속 파신 거예요? 추석이라 대목인가?"
"대목은 무슨. 사료 값 때문에 도저히 안되겠더라. 팔수록 마이너스야. 그렇다고 마냥 키우면 월령만 높아져 더 싸지고."

"이번 구제역 파동으로 소가 모자를 텐데. 가격이 안 올랐나요?"
"오르긴 뭘 올라. 미국 소가 들어왔지 않은가. 한우 값은 계속해서 떨어지는데 사료값은 계속해서 오르고. 우루과이 라운드 때도 버틴 자네 장인도 이번에는 소 그만 키우자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해서 말이지"

"예전에는 소 판 돈으로 다시 송아지 사셨겠지만, 이번에는 그 돈으로 따로 계획한 거라도 있으세요?"
"빚 갚아야지. 축사나 소 모두 빚이라 소 팔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그래서 걱정이네. 이번에 심은 가지도 돈이 안 되는 것 같고, 버섯은 올해 봄에 심은 터라 이번 겨울에 안 날 테고. 이번에는 자네 장인이 또 무엇을 한다고 하려나."

"그나저나 소 키우시는 게 아버님 낙이었는데, 어쩌신대요?
"그러게 말일세. 실질적으로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소 키우는 건 정말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는데."

장인어른의 자존심은 언제 찾을 수 있을까요?
▲ 1년 전 축사 장인어른의 자존심은 언제 찾을 수 있을까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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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장인어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보물, 소를 팔고 계셨고 그에 대해선 마땅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단순히 소 사료값만 계산하여 손익을 내고 계셨지만, 축사 등에 들어가는 감가상각비나 소를 직접 키우시는 장모님의 인건비까지 감안한다면 소를 키우면서 입는 손해는 상상 그 이상인 터, 조금이라도 일찍 소를 파는 것이 더 합리적인 행위임은 분명했다.

농촌에 무관심한 정부

이제 더 이상 소를 키울 수 없음은 물론이요,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는 처갓집의 현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앞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까꿍이는 기억할까?
▲ 할머니와 소 까꿍이는 기억할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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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장인어른이 가장 많은 애정을 갖고 계신 축산업의 현실을 보자. 기존에 6백만 원 이상 하던 한우 한 마리의 가격은 구제역 파동 이후 시장에서 보통 400~500만 원 정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국제 곡물가 인상으로 인해 사료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으니 과연 누가 요즘과 같은 시기에 소를 키우면서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누가 축산업의 앞날을 보고 투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우가 아닌가?
▲ 소에게 짚풀 주는 까꿍이 그래도 한우가 아닌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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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이런 상황에 대해 현 정부가 아예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농가를 지원하겠느니, 경쟁력 있는 축산업을 만들자느니 변죽을 울려대고 있지만 정부는 복지부동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중이다. 2008년부터 30% 이상 오르고 있는 사료값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환율 정책을 유지하며 대기업 수출만 신경 쓰는 게 현 정부의 모습 아니던가.

게다가 추석에 내려가니 장모님은 더 한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셨다. 가지를 공판장에 내놓아도 제대로 값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의 정책에 있다고 농민들 간에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물가가 너무 오르자 정부가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공판장의 가격을 일부러 낮추고 있다는 농민들의 이야기.

물론 그럴 리 없을 테지만 그런 논리를 만들어낸 농민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심 마트에서는 가지 2~3개에 2000원 하는데, 공판장에서는 50개들이 한 박스에 적게는 2000원, 많이 받아야 10000원이라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면 그와 같은 소문이 진실로 받아들여질까. 이는 그 진위를 떠나 가장 보수적인 계급인 농민마저도 이 정부에 기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로지 재벌과 자신들의 잇속에만 관심있는 현 정부에 대해 농심마저 지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농심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은 이번에 공개된 위키리스크를 통해서 더욱 분명해졌다. 위키리스크는 한국 농업에 관해 현 정부가 어떤 발언들을 했는지 폭로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가관이다.

"몇 안 되는 축산업자와 귤 재배자들 때문에 한국이 한-미 FTA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한국의 소는 미국산 사료를 먹기 때문에 한국 쇠고기는 진짜 한국산이 아니며, 따라서 한국 쇠고기를 살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것."
(2007년, 이명박)

"지금까지 우리 의원들은 농민들을 두려워해 진정한 현안을 다루지 않고 농업보조금만 지급해왔다."
"농업보조금정책을 지속하는 게 왜 해로운지 설명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국회는 농민에 저항할 용기를 내야 한다"
(2006년, 남경필)

한 국가의 식량안보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이 시기에 자국의 농업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무조건 차만 팔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현 정부. 뼛 속까지(to the core) 친미, 친일의 입장에서 우리의 농업을 폐하려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외국 사료를 먹지 않아 한우가 아니라면 그대들은 과연 한국인인지. 당신네들이 먹고 있는 음식 중 국산은 아주 미미한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을 텐데 그 비율마저 줄이는 게 당신네들의 할 일인지.

끝으로 다시 한 번 묻는다.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지?


태그:#농업, #위키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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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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