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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른이 되고 싶은 건 누구를 때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본 어른들은 모두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 사람들이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거리낌 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맞지는 않았다. 군대 이야기에서 때렸다는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얻어맞기만 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때린 것보다는 맞은 것을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 교사들은 우리를 그렇게 때리는 것이다. 많이 맞은 사람이 많이 때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되풀이를 끊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맞기만 하고 때리지는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 최소한 자식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꽃의 나라> 중에서

 

1963년생인 작가가 고3때 체험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꽃의 나라>(문학동네)는 폭력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성장소설이다.

 

소설은 항구가 있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그곳에서 자란 주인공인 '나'가, 새로운 꿈을 안고 항구 인근 도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시에서의 첫날, 나는 그 도시의 패거리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심한 폭행을 당한다. '낯선 곳에 왔다는, 낯선 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하여 '나'는 함께 자취하는 인호와 그 패거리들을 보기 좋게 날려 버릴 '복수'를 계획하게 된다.

 

꿈도 꾸기 전에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맛봐야만 했던 폭력 때문에 '폭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 상처가 오죽했으면 한편으론 절대로 폭행을 하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까지 하면서.

 

그는 머리카락을 잡은 채 나를 끌고 갔다. 학생과는 다른 동 이층에 별도로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두 명의 학생이 발을 벽에 붙인 채 원산폭격을 하며 끙끙 앓고 있고, 옆에는 죠스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한 명이 쓰러지자 그는 들고 있는 몽둥이로 내리쳤다. 얻어맞은 이는 소리를 지르며 나동그라지더니 꾸물꾸물 기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발은 벽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후들거렸다. 비명을 지를 줄 아는 벌레를 벌겋게 달군 꼬챙이로 찌른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 나올 것이다. 나는 위축되었다. 헬박사(학생과장)는 죠스(체육교사)에게서 몽둥이를 건네받았다.

 

"좇 만한 새끼가 까져가지고. 엎드려" 나는 영기를 떠올리며 엎드렸다. 한 대 한 대가 살을 파고들어 뼈를 바스러뜨릴 것 같았다. 몸이 휘어지고 신음이 새어나왔다. 몇 대만에 혼이 빠져나가려고 했다. 나는 열대 만에 쓰러졌고, 열다섯 대 그리고 스무 대에서 다시 쓰러졌다.-<꽃의 나라>에서

 

그런데 학교에도 이처럼 폭력이 난무한다. 이 모습, 40대 중반인 내게 그리 낯설지 않다. 요즘 학생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말도 안 되는' 풍경이지만, 40~5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지난 날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당연한 듯 걸핏하면 벌어졌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전통은 '전국에서 폭력 횟수도 강도도 3위'.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심지어는 외박을 해 학교에서 부부싸움을 벌인 사회 교사가 분풀이와 구겨진 자존심 회복을 하고자  아이들을 폭행하는 일도 우습게 벌어진다. 그것도 100대씩이나 때리는. 하지만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워낙 자주 있어온 일이므로. 아니 꾹꾹 눌러 참는다.

 

주인공인 나는, 도시에서의 첫날 얻어맞은 후 고통을 삭이지 못해 위안삼아 했던 담배빵을 들켜 학생부로 끌려가 이처럼 심하게 얻어맞기도 하고, 폭력서클 '형제파' 아이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폭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도리어 폭력조직에 가담함으로써 폭력에 당당해 진다.

 

그리하여 2학년 겨울 방학, 소년은 비로소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그런데 소년의 이런 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년 앞에 국가의 거대한 폭력이 휘몰아친다.

 

군인들은 인근의 집이나 건물, 학원, 여관 따위에 들어가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나왔다. 끌려온 이들은 한바탕 얻어맞은 뒤 길바닥에 누워 좌우로 굴러야 했다. 머리카락과 맨살이 엉망이 된 다음에야 자신의 혁대로 스스로 손을 묶고, 묶은 손으로 옷은 든 채 트럭에 올라탔다. 그 모습이 스스로 털을 뽑고 기름통으로 들어가는 닭 같았다. 너무 많이들 그러고 있어서 우리가 원래 닭이었는데 잠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군인들은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고 사람을 끄집어냈다. 먼저 기사가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뒷자석에 있던 양복 입은 남자와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 남자가 자신들은 신혼여행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고 그 속에 동그란 눈알이 들어 있었다.

 

사십대 남자가 한낮의 사하라 사막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물 한모금만"  군인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가와 바지 버클을 풀고 오줌을 누었다. 오줌이 사십대 남자의 머리에 쏟아졌다. 남자는 입을 벌리고 꿀꺽거리며 그걸 받아마셨다.-<꽃의 나라>에서

 

소년이 겪는'5·18광주민주화운동'일부다. 2학년 가을 어느 날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후 도시는 데모 때문에 어수선해진다. 그리고 고3년생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등하교길에 엄청난 폭행을 당한다. 단지 그 도시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소설의 절반은 개인과 학교의 폭력을 다루고 나머지 절반은 이처럼 개인의 어떤 노력이나 법, 정의 등으로도 절대 맞설 수 없는 국가의 폭력을 다룬다. 그런지라 소설 전반적으로 폭력의 순간이 자주 묘사된다. 그러기에 읽는 동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두사부일체> <화려한 휴가>의 장면들이, 보도를 통해 수없이 봤던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거리 풍경과 시민군들의 모습들이 서로 엉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희망'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누렇게 삭아버린,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생활계획표 같은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다."-'작가의 말'에서

 

소설은 '오래지 않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저자는 이처럼 말한다. 우리가 이처럼 앓고 있는 이유는 미워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책속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폭력에 대해서만 말했는데, 주인공 또래 남자 아이들의 우정과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첫 경험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환상 등의 묘사도 뛰어나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덧붙이는 글 | <꽃의 나라>(한창훈 씀 2011.8 문학동네 11000원)


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문학동네(2011)


태그:#폭력, #5·18광주민주화운동, #성장소설, #장편소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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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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