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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피지배계급이 열심히 일하면 지배계급이 이익을 보지요. 그래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에게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하고 피지배계급은 반복된 주입 속에서 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헤게모니입니다."

대중들은 종종 자신에게 손해인 입장을 적극 옹호하곤 한다. 자신의 명의로 된 집 한 채 없는 한국의 저소득층이 종부세 완화, 보편적 복지 축소, 교육경쟁 강화 등 자신에게 불리한 정책을 주로 펴는 이명박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현상은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 것일까?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런 현상을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옥중수고>에서 자본주의의 지배방식인 강압과 동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헤게모니', '시민사회', '포드주의'등의 개념을 토대로 다각도로 분석했다.

<옥중수고>를 교재로 지난 8월 30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린 '사회학고전읽기' 시즌3 두 번째 특강에서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본주의에서 지배는 지배계급의 강압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필요로 한다"며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라고 말했다. 그는 "지배계급이 부르주아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상식과 세계관 등을 피지배계급에게 주입시키는데 이것들이 헤게모니를 구성한다"며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나 민중, 대중들이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지배계급의 강압에 맞서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도 맞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 주목받는 이유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오마이뉴스>에서 '사회학 고전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오마이뉴스>에서 '사회학 고전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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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동시에 공산당의 서기장을 지냈으며 하원의원에도 선출됐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1926년 체포되어 20년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1937년 뇌일혈로 사망했는데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수감생활 동안 감옥 안에서 집필한 32개의 수고를 묶은 것이다. 김 교수는 "<옥중수고>와 안토니오 그람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1922년에 무솔리니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때 이탈리아 대중들은 무솔리니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는데, 그람시는 이런 광경을 보고 대중들이 왜 잘못된 무솔리니 정권을 지지하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람시는 이후에 헤게모니 개념을 정립하는데 그가 이렇게 다른 사회이론가들과 구별되는 이론을 만들게 된 것에는 이런 배경들이 있지요."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3000쪽의 방대한 분량에 '정당론', 국가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국가와 시민사회', 자본주의의 지배양상을 담아낸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문제, 마르크스 철학 연구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다. 감옥에서 검열을 받아가며 떠오른 단상들을 메모하듯 적은 탓에 흐름이 다소 산만하고 앞에 한 말이 뒤에서는 뒤바뀌기도 하는 등 일관성이 떨어지는 단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옥중수고>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감옥 안에서 세계의 변화를 짚어낸 그람시의 뛰어난 통찰력 덕분이다. 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쓰여진 책들 중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으로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 2가지를 꼽는다"며 "<옥중수고>는 특히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 분석과 문화분석, 사회운동, 포드주의 축적체제에 대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지배, 동의와 강압이 함께 필요"

'시민사회'와 '헤게모니'는 그람시가 세상에 내놓은 통찰 중 가장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개념이다. 김 교수는 "헤게모니는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고 시민사회란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기서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란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말했던 '정당성'과 대단히 유사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언뜻 생각했을 때 사람들에게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사고방식이 곧 헤게모니인 셈이다. 김 교수는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들의 상식이나 세계관 등을 피지배계급에게 주입하려고 하는데 이런 과정이 벌어지는 무대가 시민사회"라고 덧붙였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썼을 시기의 유럽은 부르주아 지배가 상당히 공고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지배가 단순히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해 유지되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 이외의 영역인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다양한 제도와 관습 등의 헤게모니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파했지요. 그람시는 시민사회에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제거하면 부르주아 계급이 경찰과 군대만으로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지배에는 강압뿐만 아니라 동의의 영역이 필요하다는 통찰이지요."

사회주의자였던 그람시는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잡지 않고 단순히 국가만 장악해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전략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김 교수는 "그람시는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강제에도 맞서야 하지만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도 맞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그람시의 시민사회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작용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배계급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가 구축되고, 각축을 벌이는 공간이기도 하다"며 "보수 세력이 제안하는 보수 프레임이 헤게모니라면 여기에 맞서서 진보 세력이 제시한 진보 프레임은 대항 헤게모니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 특강 수강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 특강 수강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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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주의, 노동자를 자본주의에 종속시켜

헤게모니와 시민사회가 그람시식 국가의 분석이라면 <옥중수고>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포드주의는 그람시식 자본주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생산 방식 중 하나인 포드주의는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제거한 생산 체제다. 김 교수는 "그람시는 감옥에서 포드주의를 가리켜 '강압과 동의의 새로운 형태'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람시는 포드주의가 노동자의 생활을 합리화하려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획이자 양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포드주의는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지요. 그람시가 우려했던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노동자계급이 포드주의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에서 보면 포드주의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고도화인 동시에 자본주의 그늘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옥중수고>에서 그람시가 한 설명은 다소 불완전하지만 감옥에 앉아서 미국과 전후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한 놀라운 통찰입니다."

김 교수는 "포드주의에 대한 통찰을 비롯해 그람시가 <옥중수고>에 썼던 이론들은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사상가인 루이 알튀세르의 국기 기구론이나 영국의 문화사회학자인 스튜어트 홀의 권위주의적 민중주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시민사회영역 내에서 대안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환경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단체들 역시 그람시의 시민사회 이론에 많은 부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산업화가 지배적인 헤게모니였고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는 민주화가 우리사회의 자발적 동의를 창출했던 헤게모니였다"며 "이런 현실인식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헤게모니를 구성해 나갈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다.


태그:#김호기, #그람시, #사회학 고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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