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옥좌 임금의 자리. 만인에게 벼슬을 내려줄 수 있는 자리다.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민심이 흉흉하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효수하고 안평을 강화에 안치했으나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함길도 변방의 군사들이 동요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길은 여론을 생산하는 유생과 당상관들을 장악할 수 있는 인물을 적소에 심는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늦을수록 뜬소문이 확대 재생산된다.

"영의정을 누구로 하면 좋겠는가?"

수양이 한명회의 뱁새눈을 쳐다보았다. 황보인이 죽었으니 영의정 자리가 공석이다. 누구라도 빨리 앉혀야 한다.

"그야 당연히 나리께서 오르셔야지요."

파격이다. 종친은 조정에 출사할 수 없다는 규정을 깬 의외의 발상이다.

"이 자가 내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군."

수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명회도 수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로 그 맛이야. 감투란 스스로 쓰거나 타인에게 씌워주어야 제 맛이지 남이 씌워준 감투는 감칠맛이 떨어지거든."

수양의 입가에 달콤한 웃음이 그려졌다. 한명회의 입가에도 뿌듯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심전심이다. 권력이란 만인에 군림하고 그것을 행사했을 때 희열을 느낀다. 그러한 권력의 속성을 수양은 알고 있었다.

"영의정은 그렇게 하고 좌의정과 우의정은?"
"좌의정엔 정인지, 우의정엔 한확이 타당할 줄로 아옵니다."

예정된 수순이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과 조극관이 참살되던 죽음의 문을 살아서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수양에게는 김종서처럼 저돌적인 투사형 좌상보다도 만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원만한 좌의정이 필요했다. 자신의 강성을 중화시켜 백성들에게 전달할 인물로 정인지가 적임자였다. 한명회가 딱 집어낸 것이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한명회의 눈이 웃고 있다.

감투는 받아 쓸 때보다도 씌워줄 때 감칠맛이 있다

"나리는 감투 씌워주는 것을 제 맛으로 아시지만 저는 생각이 다름니다요. 감투에 대한 진정한 참맛은 내가 씌워주고자 하는 사람을 주군의 손을 통하여 씌워주는 이 맛. 이게 바로 참맛이고 고소하다는 것을 나리는 아마 모르실 겁니다."

천하의 장자방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관직을 제수한 것처럼 형식을 갖추었으나 수양 스스로 영의정에 오르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에 배치했다. 또한 이조판서 정창손, 예조판서 김조, 병조판서 이계전, 호조참판 박중림, 병조참판 박중손, 병조참의 홍달손, 형조참의 김자갱, 대사헌 권준으로 조정을 개편했다.

조정 인사를 마무리한 수양은 대전(大殿) 진용도 새로 짰다. 도승지 최항을 필두로 우승지 신숙주, 좌부승지 박팽년, 우부승지 박원형, 동부승지 권자신으로 하여금 임금의 주변을 감싸도록 했다. 인의 장막이다. 집현전 학사 출신 신숙주와 박팽년이 선임된 것이 이색적이다.

조정 대신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종친청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임금을 보위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저는 경호에 문제가 많았다. 병조판서 이계전 ·병조참판 박중손·도승지 최항·좌부승지 박팽년·우부승지 박원형·동부승지 권자신도 퇴청하지 않고 수양 곁에서 밤을 보냈다. 임금을 보좌해야 할 승지들이 수양 곁에 있어도 법도에 어긋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사진보기
▲ 무장군사 칼, 활, 창으로 무장한 호위군사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정인지를 좌상에 앉히자 즉각 효과가 나타났다. 정인지, 한확, 허우, 박종우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혹시 간당(奸黨)의 잔존세력이 수양대군을 해할까 염려되오니 군사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소서."

힘없는 임금은 어이할 수 없다. 병조에 전지를 내려 삼군진무에게 군사 140명을 거느리고 따르게 했다. 진무가 군사를 이끌고 종친청에 도착했다.

"정예군사의 군장이 이따위냐?"

한명회가 호통을 쳤다.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명회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군사들에게 직접 명을 내렸다.

"갑사는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전(弓箭)을 차라. 별시위는 궁검(弓劍)을 차고, 총통위는 칼을 차고 총통을 지녀라. 방패는 칼을 차고 팽배(彭排)를 휴대하라."

진무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한명회가 일갈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나리를 모시는 군사지."

상호군 이효지, 선공감정 최중겸, 부지통례문사 송처검, 사선서령 홍연을 의금부 가정낭관으로 삼았다. 수양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친위부대다. 그들을 시켜 김종서와 황보인, 이양, 조극관의 16세 이상 자손들을 도륙 낸 수양은  지정을 영암에, 정분을 낙안에, 조수량을 고성에, 이석정을 영일에, 안완경을 양산에 귀양 보냈다.

또한, 수양은 사복시소윤 구치관을 의금부 지사로 특별히 임명하고 경성에 가서 도호부사 이경유를 베게 하고 상호군 송취로 하여금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압령하여 평해에 안치하라 명했다. 안평대군 추종세력 소탕작전이다.

잔존세력을 소탕하고 그 우두머리를 처치하라

좌사간 정양, 우사간 김길동, 지사간 정식, 좌헌납 최효남, 좌정언 강미수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안평은 반역의 우두머리인데 어찌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주살(誅殺)하소서."

강화에 안치한 안평대군을 죽이라는 것이다.

"더 할 수 없다."

윤허하지 않았다. 김종서마저 없는데 누굴 믿고 살란 말인가. '형님 몫까지 성심을 다하여 보필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던 안평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숙부에게 보필을 받기는커녕 보호해주어야 할 입장이다. 마음이 허할 때 의지하고픈 숙부였는데 그 숙부는 지금 곁에 없다. 보고 싶다.

"주공은 무경에게 협박당하여 난을 일으킨 관숙과 채숙을 베었습니다. 하물며 난을 일으키려한 역적을 베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신 등의 청을 윤허하소서."

정양이 다시 아뢰었다.

"더 이상 논하지 말라."

단호히 물리쳤다. 임금의 의지가 완강하자 대사헌 박중림, 집의 이세문, 장령 김종순, 지평 김계희과 박건순이 합세했다. 총공세다.

큰사진보기
▲ 대명률 명나라의 기본 법전. 조선은 이를 차용하여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모든 공사 범죄의 판결은 대명률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안평의 죄가 하늘에 닿았는데 강화에 둔다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요 공의(公義)가 아닙니다. 안평의 죄는 주살해도 남음이 있으니 극형에 처하소서."

"지금 안평의 당여는 제거하였으나 그 악의 우두머리가 아직도 살아있으니 어찌 대의에 합당하겠습니까? 청컨대 대명률(大明律)로 처치하소서."

"대율이라니 당치 않다."

나이 어린 임금이지만 시강원에서 세자교육을 받았고 제왕학을 공부한 군주다. 임금이 꿈쩍하지 않자 육조 당상과 부마부, 중추원 당상, 도진무, 삼공신 자제가 나섰다. 총력전이다. 그래도 임금은 밀리지 않았다. 마지막 주자 양녕대군이 나섰다.

"안평의 악랄한 반역은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율에 의하여 시행하고 형을 받은 자는 모두 효수하소서."

종친의 최고 어른이다. 어찌할 것인가. 힘이 부친다. 삭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홀로 있는 것만 같았다. 숙부에게 사사하라는 교지를 내려야 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다. 허나, 그 자리가 올라가고 싶다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다고 내려갈 수 있는 자리인가.

"영의정의 의논을 따르라."

수양대군의 의견을 좇아라는 것이다. 결국 어린 임금이 무너지고 말았다. 수양의 명을 받은 의금부도사가 강화에 도착했다.

"죄인은 어명을 받아라."

안평이 거적자리에 무릎을 꿇고 동쪽을 바라보며 4배를 올렸다. 임금에게 드리는 마지막 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한무리의 기러기가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바다건너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이 어린 임금이 계신 동쪽 땅이다. 안평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과 수양 형님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안평이 약사발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안평이 사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선혈을 내뿜던 안평이 꼬꾸라졌다. 하늘에선 이름 모를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큰사진보기
▲ 영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가 같이 잠들어 있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세상의 여자들 중 왕을 낳은 여인은 극히 드물다. 왕의 정실이라도 아들을 낳지 못할 수도 있고 왕자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 아들이 꼭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후궁이나 이름없는 궁녀가 승은을 입어 왕자를 낳았다 해도 그 아들이 왕이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헌데 세종의 정실 소헌왕후 심씨는 아들을 여덟이나 낳았다. 그 중 하나는 왕위에 올랐고 또 하나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려 한다. 비극의 씨앗이다.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