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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는 대한민국 공식 휴가철이다. 매년 이 시기만 되면 사람들은 다시는 여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산으로 바다로 몰려 간다.

하지만 나는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휴가를 떠난 적이 없다. 특별히 산과 바다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 번 정도 피서를 떠날 여유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지도 않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최근 3년간 애인이 없었다는 것 정도(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이유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더운 휴가철을 집에서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며 쓸쓸하게 보내는 이유는 여름 휴가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시계를 2006년 이 맘 때로 돌려 보자.

통영에 가면 해산물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고?

친구 A군도 자신의 차량에 냉각수가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친구 A군도 자신의 차량에 냉각수가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양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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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6년 8월. 20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마땅한 계획 없이 막연하게 여름 휴가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조금 일찍 휴가를 다녀온 지인에게 뜻밖의 정보를 들었다.

지인은 여름 휴가를 맞아 경상남도 통영을 다녀 왔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바다와 인접한 통영에서는 생선회를 비롯한 각종 해산물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해산물을 밥보다 더 좋아했던 나는 지인의 말에 혹해 여름 휴가지를 통영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중고차를 구입한 친구를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사랑하는 여인과의 낭만여행은 아니지만, 휴가 계획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애통하게도 기업의 휴가 일정은 다 제각각이었고 예상과는 달리 다른 친구들을 섭외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친구 A군과 나는 단 둘이서 '우정여행'을 빙자한 '통영 해산물 탐방'을 떠나기로 했다.

8월 6일 일요일, 화창한 날씨 속에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다. 그 때 A군의 실망스런 한마디가 들려 왔다.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창문 열고 가도 되지?"

30도가 훌쩍 넘는 더운 날씨에 에어컨마저 고장 난 차를 타고 3~4시간을 달려야 한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하지만 20대 젊은이들의 여행에서 그 정도의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마침 대전과 통영을 잇는 고속도로의 완전 개통(2005년 12월)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고속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서 잘 들리지도 않는 음악을 목청껏 따라 부르며 해산물의 천국으로 가고 있었다.

보닛에서 올라오는 정체 불명의 연기, 혹시 차량 폭발?

갑작스런 차량 고장으로 통영에 대한 환상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갑작스런 차량 고장으로 통영에 대한 환상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 통영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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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는 유난히 터널이 많았는데, 터널을 지날 때마다 창문을 올리는 바람에 고속도로에서 때아닌 찜질방 효과를 느껴야 했다. 혹 그 때라도 차가 지나치게 뜨겁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 다시 긴 터널을 만났다. 그리고 운전을 하던 A군이 "차가 왜 이리 뜨겁지?"라고 말하는 순간 차의 보닛에서 갑자기 연기가 올라 오면서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말았다. 다행히 터널 안에 차가 거의 없어서 추돌 및 충돌 사고는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차가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A군과 나는 차가 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영화에 나오는 터널 안 차 폭발 장면을 생각해 보면 출구와 가까운 쪽으로 무조건 달려야 했지만, 우리는 차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차가 멈춘 터널은 무려 3170m의 길이를 자랑하는 육십령 터널이었고 우리의 차는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멈추는 바람에 들어온 입구도 나가는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차가 멈추면서 연기는 잠잠해 졌지만, 한 번 멈춘 차의 시동은 당연히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보닛은 너무 뜨거워서 열어 보기는커녕 손을 대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공포에 떨고 있던 우리는 간신히 지나가는 순찰차를 만나 견인차를 부를 수 있었다.

견인차 기사님은 우리가 멈춘 곳이 경남 함양군 일대이고 제대로 된 시설이 갖춰진 정비소를 가려면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대구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일요일이라서 제대로 영업을 하고 있을지도 불투명하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가장 가까운 정비소로 가달라고 요청했고, 견인차 기사님은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차를 매단 채 경남 함양군 서상면에 위치한 작은 정비소로 자리를 옮겼다.

두꺼운 장갑을 낀 카센터 사장님이 간신히 보닛을 열자 보닛에서는 또 다시 연기가 마구 올라 왔다. 찬 물을 뿌려 연기를 식힌 후 사장님은 냉각수가 없어서 엔진이 다 타버렸다고 설명했다. 에어컨 고장이 아니라 냉각수가 없어 에어컨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온 것이란다.

당연히 시골의 작은 정비소에서는 당장 엔진을 구할 수 없었고, 대구에서 엔진을 가져 와서 교체하려면 다음날 오후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엔진 교체 비용은 무려 120만 원.

400만 원을 주고 구입한 중고차에 냉각수를 채우지 않아 120만 원을 주고 수리한다는 것은 다소 황당한 일이었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A군과 나는 지갑의 돈을 탈탈 털어 계약금 20만 원을 지불하고 시골의 이름 모를 자동차 정비소에 엔진교체를 의뢰했다.

2006년 여름에 겪은 여름 바캉스 트라우마

우리의 저녁 만찬은 통영 바다의 푸짐한 해산물 대신 허름한 여관의 배달 음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우리의 저녁 만찬은 통영 바다의 푸짐한 해산물 대신 허름한 여관의 배달 음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 양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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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라면 통영에서 해산물 파티를 벌일 시간에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에 버려진 우리는 그곳에서 차가 고쳐질 때까지 하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엔진 교체비 120만 원과 서울로 돌아올 기름값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남은 돈은 10만 원 남짓. 하루 동안 10만 원으로 무얼 할까 고민한 우리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경남 거창으로 갔다. 그래도 거창이 그나마 지내기 좋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 거창은 서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도시의 느낌이 풍기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시간이다. 거창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 9시를 향하고 있었고 그 시간에 아무 정보도 없는 거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20대의 마지막 여행에 대한 환상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통영에 간다고 생각할 때만 해도 팔팔하던 체력은 방전된 건전지처럼 순식간에 모두 빠져 나간 듯 했다.

결국 우리는 거창버스터미널 인근의 상록장 307호에 방을 얻고 1만2000원짜리 야식과 쓴 소주로 배를 채우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도 기운을 차리지 못해 컵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정비소 앞에서 무기력하게 두 시간을 기다려 차를 찾았다.

하지만 "차도 찾았으니 다시 통영으로 가볼까?"라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돈도 없었지만, 기운은 더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묵묵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쓸쓸하게 20대의 마지막 여행을 마무리 했다.

나도 친구 A군도 2006년의 트라우마로 인해 지난 5년 동안 한번도 여름 바캉스를 떠나지 못했다. 나처럼 여름 휴가도 가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 되기 싫다면 여름에 장거리 운전을 하기 전에는 필히 냉각수를 확인하시길 바란다. 특히 중고차라면 더욱.


태그:#여름 휴가,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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