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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3월 5일부로 5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5월 2일부로 현재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무작정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의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고작 2개월 밖에 쉬지 않고 또다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 기사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기자말>

그나마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직장인
▲ 소주를 기울여야 그나마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직장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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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회사를 그만두리라 마음 먹었던 것은 5년 전 입사와 함께였다. 비록 책만 아는 백면서생이 되기 싫어 사회로 내디딘 발걸음이었지만 언제까지 회사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딱 3년만 일하고 돈 벌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었고, 그나마 북한학과 전공을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던 물류 기업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돈을 벌다가 그만두고 공부를 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결혼을 하고 덜컥 아이까지 낳다 보니 기존의 계획은 미루어졌고, 꿈은 멀어져 갔다. 어느새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받아 드는 월급명세서에 미래를 저당 잡힌 채 하루하루를 까먹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밤늦게 술잔을 기울여야만 못 이룬 꿈을 죽은 아들 불알 잡듯이 읊조릴 수 있는, 그런 소시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내가 지난 3월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사표를 던졌다. 어디 옮길 곳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엇을 할 것인가 뚜렷한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사표부터 제출했다.

후배의 이직과 갈등

사실 퇴직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올해 1월 바로 밑의 후배가 이직을 통보한 이후였다. 녀석은 회사에 들어올 때부터 자신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으로의 이직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는데, 1년 동안 줄기차게 노력한 결과 후배는 자신이 원했던 회사에 더 좋은 조건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공백으로 늘어난 업무량과 늦어지는 퇴근 시간 때문에 후배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원망은 부러움으로 바뀌어갔다. 궁극적으로는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라던 후배의 꿈은 부럽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온 그 열정만은 부러웠다. 적지 않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후배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 부러움은 이내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후배도 이렇게 열심히 꿈을 향해 뛰고 있는데,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취직 후 결혼을 하고 곧이어 아이를 낳으면서 너무 현실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일반적인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혹여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핑계는 아닐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 보람이 사라진 일상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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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으로 현실에 대처했던 기억
▲ 08년 화물연대파업의 기억 열정적으로 현실에 대처했던 기억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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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똑같은 일상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할 때 느끼는 보람이 되어야 한다는데, 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외에 눈곱만큼의 보람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입사원 때는 비록 전공과 상관없어도 화물연대파업 등 책으로만 보던 노동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었는데, 5년 차 대리에게는 이제 그마저도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내게 결정타가 된 것은 2월 설날 연휴였다. 모든 물류회사가 그렇듯이 난 설날 연휴를 맞아 쏟아지는 물량을 치우기 위해 정신이 없었는데,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 일련의 과정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내가 왜 이 자리에서 끊임없이 욕을 들어가며 죄송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내가 왜 5년 전에 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앞뒤 재보지 않고 마냥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만큼의 강한 회의감.

회사에 대한 실망

문제는 내가 속한 회사가 이런 조직원들의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디 사표 제출을 꿈꾸는 회사원들이 비단 나뿐이겠는가. 다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 그래도 회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혹은 조직원들과의 정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차마 그만두지 못할 뿐. 따라서 회사가 조금이라도 조직원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퇴사율은 낮아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지켜본 바, 내가 몸 담았던 회사는 그와 같은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다.

우선 회사는 명색이 대기업의 계열사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지 못했다.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회사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 부끄러워했으며, 그만큼 패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물론 회사는 신입사원 때부터 회사의 자긍심에 관해 정신교육 등을 시켰지만, 이는 현장의 업무 속에서 한낱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회사에 대한 자긍심은 이런 교육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 자긍심 회사에 대한 자긍심은 이런 교육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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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이 회사에 대해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인이 회사의 대표로 다른 업체와 만났을 때 그만큼 떳떳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상대방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화주한테는 계약한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서, 협력사한테는 계약 자체가 워낙 악조건이어서.

특히 협력사와의 관계의 경우, 회사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며 협력업체한테 일을 시키면서도 시장의 룰인 익월 현금 대신 4개월짜리 어음을 지급한다는데 내가 어찌 당당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공헌은 차치하고, 시장의 룰마저 어기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항상 뒤통수가 따가울 뿐이었다. 사석에서 만나면 항상 들을 수밖에 없는,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욕지거리들.

그렇다면 회사는 내부적으로 조직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가. 이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급여 수준일 텐데 회사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구성원들의 원망을 샀다. 회사는 재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조직원들의 연봉을 1년 동안 20% 삭감하고, 연차수당을 없앴으며(물론 대신 연차사용을 장려했지만 현장 담당자로서 이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임금은 4년 동안 동결시켰는데 이는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에서 비롯된 회사의 손실을 고스란히 직원들에게 떠넘긴 형국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그때마다 각서를 받는 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조직원들을 더욱 비굴하게 만들었다.

시장에서의 불신과 임금에 대한 불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회사에 대해 가장 크게 실망했던 것은 주먹구구식의 인사관리였다. 회사는 2008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비정규직을 자르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는데, 빠진 사람의 빈자리는 클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간 이의 업무를 분산시킴으로써 당장의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다가 나머지 구성원들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아우성을 치면 그제서야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을 하나씩 넣어주었는데, 이는 '그래도 회사는 굴러간다'는 명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덕분에 난 7명이 하던 업무를 후배와 함께 하루도 쉬지 못한 채 근 5개월 동안 단 둘이서 해내야만 했었고, 결혼식 때는 그 전날 밤 10시까지 일한 것도 모자라 결혼식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하여 마감을 끝내고서야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는 우리 부서로 옮긴지 1주일 밖에 되지 않은 후배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던 입사 4년 차의 내 모습.

물론 회사가 어려울 때 조직원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회사가 망하면 그 조직원들 역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회사가 이런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이다. 회사가 나중에라도 개인의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되레 그 당시의 책임만을 운운한다면 과연 어떤 조직원이 회사에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이와 같은 회사의 모습은 내가 퇴직을 고민함에 있어 갈등의 요인이 되기 보다 오히려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혹자는 대한민국의 모든 회사들이 거의 이 비슷한 수준이라며, 어디를 가도 똑같으니 차라리 붙어있으라 충고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어차피 결심한 거, 이 기회에 회사를 떠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좀 더 넓고 다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싶었다.

아내의 재가

현실에 매몰될 것이냐, 아님 발판이 될 것이냐
▲ 결혼 현실에 매몰될 것이냐, 아님 발판이 될 것이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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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대한 실망과 내 직업에 대한 자괴감.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표를 낼 수는 없었다. 왜?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요, 두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떤 직장인이 위와 같은 불평, 불만만으로 쉽사리 사표를 던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동반자의 확고한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으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퇴직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오히려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까지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 것은 가족 탓이 아니라 결국은 나 자신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라고.

뜨끔했다. 정확한 지적이기 때문이었다. 난 그 길로 팀장에게 사표를 냈고, 2주 후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 얼마나 쉴 것인지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우선 이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더 넓게 생각하고 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팀장에게 사표를 낼 때의 그 후련함이란.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주위의 반응은 부러움 반 우려 반이었다. 사람들은 가계대출이 없기 때문에, 아내가 순순히 허락해 주었기에 결단이 가능했다며 부러워도 했지만 곧 출산할 둘째는 어떻게 키울 것이냐며 물어댔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제 발로 회사를 나가다니 너무 무책임하고 무모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의견이었다.

과감하게 사표를 내던지는 아빠
▲ 둘째 출산을 앞두고 과감하게 사표를 내던지는 아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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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에 대한 두려움. 다행히 그것은 대학원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면서 느끼던 조바심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취업하지 못하면 왠지 사회에서 도태되고 뒤쳐지는 기분이었건만, 이번에는 퇴직이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던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5년 간 경력을 쌓지 않았던가.

그렇게 시작된 나의 백수 생활. 과연 난 행복할 수 있을까?


태그:#사표, #백수,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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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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