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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미얀마) 근대사에서 88-8-8이라는 민중에 의한 전국적인 규모의 항쟁이 일어난 지 23년이 되었다. 항쟁기간 동안 모든 이들은 변화를 바라는 한 목소리를 내었으나 독재에 거스르고자 했던 것이 1962년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래로 정치, 경제, 학문 그리고 윤리적으로 그보다 더 악한 모습을 낳고 말았다.

 

오랜 시간 동안의 불만이 사무쳐 1988년 3월 찻집에서 일어난 다툼이 다른 분쟁을 촉발하고 그 가운데 한 학생이 공안요원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되었다. 학생들에 의해 민주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수사해야한다는 요청에 관계 당국이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6월, 군부에 저항하는 시위가 다시 벌어졌다.

 

그 해 7월, 사회 불안정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버마사회주의 계획당(Burmese Socialist Program Party, 이하 BSPP, 당시 군사정권이 만들고 합법이라고 유일하게 인정한 정당) 의장 네 윈(U Ne Win)과 대통령 우 산유(U San Yu) 그리고 몇몇 고위 관료들이 사임하였다. BSPP 임시 회의에서 의장은 일당 체제냐 다수 정당 체제냐를 선택하는 것은 민중에게 달려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특별히 그는 다시 시위가 발발하면 군대가 사살할 것이라 덧붙였다. 사실 그의 발언은 불길한 징조였다. 오래지 않아 우 세인 르윈(U Sein Lwin) 대통령이 등장하고 이 정부가 1당 체제를 무너뜨릴 의지가 없음이 밝혀지자 사람들이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8년 8월 8일, 진정한 바램을 이루기 위한 전국적 규모의 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불법적으로 힘을 얻은 이들이 평화적인 변화의 숭고함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8월 8일 군부는 전국적으로 어린이를 포함하여 수천의 무고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군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었고 대통령 우 세인 르윈은 사임하고 차기 대통령 우 마웅 마웅(U Maung Maung)이 집권하였다. 그는 당시 30년 동안에 군인이 아닌 첫 번째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 그의 아주 짧은 재임기간 동안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현실화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1988년 8월 18일, 군부는 SLORC(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 군부정권의 이름)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민중을 짓밟고 다시 국가 권력을 앗아갔다. SLORC는 자신들이 권력을 오래 행사할 의사가 없고 빠른 시일 내에 다당 체제를 수립할 것이며 국민 총 선거 후에 승리하는 정당에 권력을 이양하겠노라고 선언했다.

 

1990년 3월 27일 총선이 이루어지고 아웅산 수찌(Daw 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정당 버마민족민주동맹(이하 NLD)이 82%가 넘는 국회 의석을 확보하며 대승리를 거두었다. 국제 사회와 유엔 심지어 SLORC도 인정하는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뤄진 선거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약속과 달리 BSPP에서 계승된, 군부가 지지하던 국민통일당(National Unity Party)이 선거에서 패하면서 국가 권력은 국민들에게 이양되지 않았다. 더욱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조차 군부가 선거 결과를 존중하도록 하는 데에 충분치 않았기에 비극적이게도 NLD와 다른 민주 세력들은 권력을 넘겨받을 수 없었다.

 

군부는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7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들의 청사진에 따르자면 1993년부터 2008년까지, 즉 지난 15년 사이에 헌법 제정을 위한 국가 전당대회가 열렸어야 했다. 영원히 권력을 쥐기 위해 그들이 편파적으로 제정한 헌법이 2008년 이름뿐인 '국민 투표'를 통하여.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고 강압적으로 승인되었다. 심지어 이때는 태풍 나르기스로 인해 수만 명의 시민이 죽고 많은 노숙자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발생한 시점이었다.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NLD는 첫째, 즉시 무조건적으로 모든 양심수를 석방할 것, 둘째, 헌법 가운데 민주주의 일반 규범에 의거하지 않은 조항들은 개정할 것. 셋째, 총선을 포함하여 모든 선거를 국제 사회 감시 하에 자유 선거, 공정 선거로 치를 것을 요구했다. 군부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NLD와 소수민족 정당들은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2010년 11월 7일, 야심에 가득찬 불법적인 총선이 치러졌고 부정 선거로 군부 정당인 연합연대개발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USDP)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31일, 정부 권력은 1988년에 권력을 장악했던 군정부에 의해 테인 세인(U Thein Sein) 대통령(전역 장군이자 전직 총리)이 이끄는 허위 민간 정부에 이양된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새로운 형태 즉, 테인 세인이 이끄는 막강한 민간 정부, 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정부이자 그 정부에 의해 국가방위 안전위원회가 헌법에 의거하여 언제라도 필요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장막 뒤에서 군부최고지도자 딴 슈에(Than  Shwe)가 조종하는 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테인 세인이 이끄는 정부는 아직 민주화, 소수 민족들간의 분쟁, 국민 화합을 위한 모든 양심수들의 석방 등의 주된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반기문 총장은 새로운 정부에 있어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 말한 바 있다. 또한 지난 7월, 유엔 인권 특별 조사위원 토마스 퀸타나(Tomas Ojea Quintana)는 테인 세인 정부가 정치범들에 대해 아직까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헌법에 따라 국경 무장 경비 요구를 거절한 소수민족 무장 세력에 대해 군부가 공격을 가하고 있는 바, 국경 지역에서는 여전히 인권침해와 전쟁 범죄가 벌어지고 있다(새 버마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만이 헌법에 의하여 합법이라며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없애기 위한 공격을 하고 있어 버마에 내전이 확대되고 있다.-역자 주).

 

작년 11월 7일, 총선 일주일 후 아웅산 수찌는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우리는 그녀가 국민적 화합과 국가 이익을 위해 대화를 요청한 바, 버마 정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외교관계자들을 만나고 해외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면서 국제적 관계를 증진시켜왔다. 또한 그녀는 NLD 정당을 강화하는 노력과 함께 젊은이들과의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그녀는 정부와 소수 민족간의 갈등은 군사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만 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중재를 맡겠다고 제안했다.

 

지난 7월 25일, 노동부 장관 아웅 찌(U Aung Kyi)가 아웅산 수찌 여사를 만났다. 2007년 9월의 샤프란 항쟁에 대한 군부의 잔혹한 탄압에 대해 국제적 압력이 있던 중에도 이러한 만남은 있었는데,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그들은 아홉 차례 만남을 가졌다. 군부는 단지 국제사회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연극을 한 것 뿐이었다. 이는 현정부에 있어 2014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는 데에 필요한 조치이자 이제 껍데기뿐인 민주화로의 변화를 위해 교활한 그 어떤 것이든 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과 수찌 여사를 만나는 동기를 신뢰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제 게임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즉, 우리의 꿈이 조만간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국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모든 우리 버마인들과 또한 국제 사회에 달려 있다. 특히 군부 독재를 경험한 한국의 경우 다른 그 어떤 나라들보다 우리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리란 바람을 갖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안타깝게도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민중의 투쟁을 지지하기보다 억압적인 정부와의 관계, 그저 천연자원을 얻어내고 버마 내에 투자하는 식의 경제적 이해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옛 말에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다. 이 말처럼 한국이 우리 버마 민중의 친구인지 독재자의 친구인지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끝으로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서 우리는 버마의 존엄함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위해 그 어떤 종류의 독재도 결코 용납할 수 없슴을 말하고자 한다. 다가올 세대를 위해 더 나은, 더 행복한 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을 그 날까지 8888 민주 항쟁에 자신의 삶을 희생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을 품고 투쟁하도록 결정된 사람들이다.    

 

내툰나잉(이메일: Naing8888@yahoo.com)

버마민족민주동맹 자유지역(National League for Democracy-Liberated Area) 한국 지부 의장

 

번역: 이상아(국제민주연대)

 

(버마어 발음표기는 원음 발음에 가깝게 한국어로 표기하였습니다.-역자 주)

덧붙이는 글 | 필자 내툰나잉: 버마인으로 버마 양곤(랑군)대학을 졸업하였고 성공회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한국에서 버마인으로서는 난민인정을 처음 받은 3명중 1명이다. 17년동안 고국 버마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태그:#버마 , #8888항쟁, #미얀마, #아웅산 수찌, #N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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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는 2000년 창립이래로 인권과 평화에 기반을 둔 국제연대 사업을 통해 해외한국기업감시 및 민주주의와 인권연대활동,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감시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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