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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9일부터 25일까지 6박 7일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가 꾸린 7기 독립정신답사단 100여명과 함께 증국 동북3성의 다롄 - 단둥 - 환렌 - 류허현 싼위안푸- 지안 - 백두산 - 옌지 - 닝안 - 하이린 - 하얼빈 코스로 항일무장투쟁지를 답사했다. 이만열 명예교수는 '독립정신 답사단'의 단장을 맡았다. [편집자말]
20일 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독립정신 답사단과 함께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의 강의를 듣고 있다. 오늘따라 선생의 강의가 지도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청중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고려가 조선에 정권을 넘겨줄 때는 그래도 두문동 72 현인이 있었지만, 조선조가 외족인 '일제'에 망할 때에 두문동 72현 같은 존재들이 있었는가, 이렇게 물으면서 "조선조는 망해도 더럽게 망했다"고 항간의 주장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대한제국 멸망 때는 두문동 72인보다 더 많은(76명) 관료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더 많은 사람이 은사금을 받았으며, 일제에 의해 재임용된 구한국 군수들은 감지덕지 감읍했다. 다만 홍만식 등이 음독자결해 관료진신들의 체면을 살렸다.

이회영 6형제가 있어 민족의 체면이 유지됐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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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나라가 망하자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가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한 이들이 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들은, 시류에 영합하여 작위를 받고 은사금을 받은, 타산에 밝은 이들에게는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게 보였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민족의 체면은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승만 9명이나 내어 '삼한갑족'의 후예로 알려진 이회영 6형제는 뜻을 같이해 전답과 가옥을 정리한 뒤 이국땅에서 나라 망한 수치와 회한을 북풍한설과 염천하절의 풍찬노숙으로 그 간고를 인내했다. 안동의 이상룡 등 유생 진신들도 나라 망한 책임을 이국땅에서 고통당하는 것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만삭의 몸이라 압록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인데도 '왜놈' 치하에 신생아의 호적을 둘 수 없다면서 강을 건너 해산토록 했다는 안동 김씨 양반가의 눈물겨운 사연은 지금도 우리의 눈시울을 붉힌다. 이회영 일가가 가산을 정리하여 신흥무관학교 등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것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이 된다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망국의 수치 속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서 5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러시아 군은 2만3000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승리는 이런 희생의 대가였다. 이 전투는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한 것 못지 않게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전승이다.

하지만 정작 승리하고 돌아오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을 향해 일본 국민들은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그가 이 전장에서 두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노기 장군 만세'를 불렀단다. 이 일화는, 비록 그 전승으로 한국의 운명이 비극으로 빠져들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일본 무사다운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지금까지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공산혁명으로 중국 인민을 해방시켰다는 것 외에, 엇갈리는 전승에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키려고 했을 때 중국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그를 군관으로 복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아무런 군사경험이 없는 그를 군관으로 복무토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후방 사령부에 근무하던 마오안잉은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마오는 "중국 인민군 수십 만이 죽고 있는데 어찌 내 자식만 살아돌아오기를 기대하겠는가"라고 했단다.

시신이라도 중국에 옮기게 해 달라는 요구에 마오는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수십 만의 중국군 시신을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다면 내 아들의 시신도 중국으로 이송하라"고 했단다. 주석 마오의 이같은 결정으로 마오안잉의 무덤은 아직도 평남 양덕군에 묻혀있다. 마오가 문화혁명 등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지금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이 같은 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도 한몫했을 것이다.

수백만이 희생된 한국전에서 한국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지도자들의 노불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가산을 정리하여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들 외에도 최익현, 민영환 같은 관료 진신들도 있었다.

나·당 전쟁 승리 원인은 신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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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회지도층의 지도자적 실천이 감동을 일으킨 것은 삼국 말기에도 있었다. 신라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두고 옳은 선택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상황에서 나당의 동서축과 고구려-백제-돌궐-일본이 합세한 남북축 사이의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동서축에 속한 신라가 승리하게 된 것을 마냥 비난만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지배층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승리의 원천이 되었다. 660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황산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은 김흠순·김품일 등의 부장(副將)과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도 백제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를 꺾지 못하고 4전4패했다.

그러나 신라군은 두 부장의 자기 희생적 결단으로 계백군을 돌파하게 되었다. 부사령관 흠춘은 그의 아들 화랑 반굴(盤屈)을 제물로 바쳤고, 부사령관 김품일은 그의 아들 소년 화랑 관창(官昌)을 제물로 바쳤다. 이들 지도자들의 자기 희생을 본 신라군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력을 다해 백제군을 격파했다.

김유신의 가정교육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할 수 있다.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이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자 신라는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강 유역의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패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의 권유로 김유신의 아들 원술만 살았다. 그 길로 부친을 찾아갔지만 김유신은 그를 맞지 않았다. 임전무퇴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을 부지한 그는 자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은 그의 어머니를 찾았으나 그의 어머니 지소 부인마저 아들을 맞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배척을 받은 원술은 부모의 이같은 교육 덕분으로 역사에 살아남는 존재가 되었다. 675년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 군이 신라의 매초(매소)성을 공격했을 때 신라는 당의 군마 3만 여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한반도 안에서 치러진 가장 큰 전쟁으로 아마도 당군 20만이 거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이는 원술이었다. 김유신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군미필 검찰총장으로 MB정권 정체성 되찾나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인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이 18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인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이 18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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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정작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말하는 데에 있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그걸 비웃는 행위가 다시 자행되고 있지 않나 하는 노파심 때문에 이를 환기시키고자 함이다.

최근 MB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부의할 두 고위직을 내정해 통보했다. 언론에 의하면 검찰총장으로 내정된 분이 주민등록법 위반에다 병역문제도 논란거리가 된다고 한다.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한때는 여당대표까지 병역미필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던 터에 '보온상수'의 퇴진으로 '병역미필정권'의 정체성이 다소 흔들리는 듯하더니, 다시 국가고위직 임명을 통해 '병역문제와 관련된 이 정권의 정체성'을 회복해 강화시키려 하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때맞춰 이 정권의 그 같은 속성을 적절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백령도 및 연평도 사건으로 안보무능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자 MB는 연평도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의 행위를 두고 '천추의 한'이라고 언급했단다. 그걸 만회라도 할 양으로 국방은 자기에게 맡기라는 듯이 '서해사령부를 창설한다', '최신무기를 도입한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국민을 향해서는 안보불감증에 걸려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그런 값비싼 비용을 들이는 안보강화조치에 앞서서 병역미필자인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임명직 공직자 몇 사람만이라도 추방했다면,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강화하는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없지 않았다. 비록 비아냥거림이 뒤섞인 여론이기는 하지만, 그런 조치가 취해졌다면 아마도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발표나 여러 안보대책이 진정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국민의 신뢰 중에서 가장 긴요한 안보정책은 국민의 신뢰다. 그래서 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안보가 불안할 때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를 신뢰하도록 하는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터에 '병역미필정권'답게 다시 병역미필 시스템을 강화하려는 듯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MB는 정말 국가안보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국가안보를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병역미필정권'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킬 수도 있는 이런 조치를 왜 취하려는 것일까.

군 면제제도가 있는 한, 병역 문제로 인해 공직에서 퇴출시키는 조치는 신중해야겠지만, 그런 문제가 있는 줄 알고도 다시 고위직으로 등용하겠다고 고집한다면, 이게 어찌 국가안보, 국방개혁에 대한 이 정권의 진정성을 신뢰하도록 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03~2006년 국사편찬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이 교수는 지난 19~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로 중국 동북3성 일대의 항일무장투쟁 유적을 답사한 제7기 '독립정신 답사단'의 단장을 맡았다.



태그:#군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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